본문내용 바로가기
[기고] 한ㆍ일 가교(架橋)의 선구자 여대남(余大男)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기사입력 2024-04-09 17:56:18   폰트크기 변경      

필자는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초입 3월초, 지인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아 일본 나카사키현에 있는 400여년 유서 깊은 호국사(護國寺)를 다녀왔다. 나가사키는 1571년 서양의 낯선 문물을 받아들인 항구도시이며 일본 유일의 교류창고로 활약하며 개항 후 지금까지 열린 항구로 남아있다

호국사는 지인의 선조되는 여대남(余大男, 1580~1659년)이라는, 한국 경상남도 하동 출신의 스님이 400여 년 전 초대 주지를 지낸 역사가 깊은 사찰이다.


여대남은 13세 때 보현암(普賢菴)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군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다카하시(高橋三九)에 의해 납치되어 여느 전쟁의 포로들처럼 인질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 체류 중 가토 기요마사가 여대남의 타고난 문학적 재능과 지혜로움을 알아본 이후 그에게 일본글과 일본의 불교 12대 종파의 하나인 일련종(日蓮宗) 교리를 깨우치게 하였다. 그 후 여대남은 꿈에도 그리운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 것을 가토에게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련종신도였다는 가토의 영향력으로 일진(日眞) 스님의 제자로 출가하게 된다

29세에 덕망을 갖춘 여대남은 구마모토의 본묘사(本妙寺)의 3대 주지 스님이 되었다. 이후에도 여대남은 다른 여러 일본 사찰의 주지 스님으로 지내면서 한국인으로서 일요상인(日遙上人) 또는 고려 상인(高麗上人) 이라고도 불리우며, 일본인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상인(上人)은 ‘위에 계신 분’, ‘높으신 분’, 또는 ‘성인’이라는 의미이다.

여대남 스님은 일생 동안 고국을 그리워했으나 안타깝게도 단 한 번도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일본 땅에서 열반하였다. 마침 나가사키 여행에 동행한 지인(여씨종친 余氏宗親, 여대남 후손)께서는 자신들 조상의 족보를 선물로 현재의 19대 호국사 주지이신 이와나가(石永)스님께 증정했다.


이와나가(石永)주지스님(왼쪽)과 여대남 후손인 여호영 씨.


일본인 이와나가 주지 스님께서는 자신을 한국의 의령 여씨 족보에 여태현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초대 주지 스님과 똑같은 여씨 족보에 자신을 올려 달라고 요청했다.

참으로 한국과 일본 간의 끈끈한 우정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인 이와나가 주지스님은 한ㆍ일간의 역사를 교과서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우리가 궁금해 하는 모든 질문을 한 가지도 빼지 않고 오히려 설명까지 달아 줄줄줄 대답해 주었다. 어떻게 저렇게 역사를 자세히 공부하셨을까 참으로 신기할 뿐이었다.

결론은 많은 고대 백제인과 고려인들이 후쿠오카의 많은 지역에 정착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선조왕의 장손인 임해군의 아들도 전쟁 중 인질로 일본에 끌려갔으나, 불법을 깊이 탐구하여 큰스님이 되었다. 그는 일련종의 개산조인 일련대사의 탄생지에 세워진 탄생사의 제 18대 주지를 역임하면서, 일련종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종단을 이끌기도 했다. 일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고 일본 후쿠오카 땅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고려인, 백제인, 조선인들이 일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질, 전쟁포로, 피난, 도피 등)이주하여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처음에는 인질, 전쟁포로 등으로 일본에 갔다가 세월이 흐르다 보니 막상 고국에 돌아가도 부모형제가 안 계신 고향이 낯설어지고, 현재를 살아가던 일본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정착하신 분들이 많다.

결국, 일본과 한국은 가까운 친척의 나라와 같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생각해 보면, 다른 어느 나라들보다도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의를 중시한다든가,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다든가. 특히 일본의 예능인 중에는 한국계가 많이 있다. 또한 ‘아리타 야끼(有田燒)’라는 유명한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한국인 이삼평( 李參平)으로 ‘도우조 이 삼뻬이(도자기의 시조 이삼평)’으로 불리며 일본에서 지금까지도 추앙받고 있다.

귀국해 가방을 여니 호국사 주지 스님께서 준 커다란 선물꾸러미 속에 청아한 군청색 포도송이가 그려진 뽀얀 ‘아리타 야끼’ 백자의 물 컵이 하나 들어 있었다. 주지스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한국인이 만든 일본의 명품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 도자기를 넣어 준 것이다.

 인천공항으로부터 후쿠오카까지 한 시간 20분 만에 도착한 뒤 하카타를 지나 신칸센과 전철을 번갈아 바꿔 타며 뎅뎅거리는 시골의 작은 철도선을 마지막으로 “이젠 곧 도착이야!!!” 안심하며 바라본 아리아케해(海) 바다의 일몰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400여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똑같은 풍경을 보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도 했을 것이고, 마음의 평화를 느끼기도 했으리라. 

나가사키 현의 남동부에 있는 아리아케카이(有明海)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 島原(시마바라)! 

일본인들 마음의 지주인 호국사에 한국인 초대 주지 스님, 여대남! 

400여 년 전, 여대남은 이미 한국과 일본의 아름다운 가교의 선구자가 아니었을까!!

신혜숙 화예 작가 (신디 테라스 대표, 前 서울 로타리 클럽 회장)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대한경제i' 앱을 다운받으시면
     - 종이신문을 스마트폰과 PC로보실 수 있습니다.
     - 명품 컨텐츠가 '내손안에' 대한경제i
법률라운지
사회
로딩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