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이중섭(1916~1956)은 한국인에게 각별한 대상인 소의 특성을 선하면서도 우직하게 묘사했다. 6·25전쟁을 피해 1951년 가족과 함께 제주 서귀포에서 1년 가까이 산 시점을 경계로 민족적인 주제의식에서 점차 자전적인 내용으로 옮겨갔다. 서귀포 시절에는 소를 중심으로 한 향토적·서정적 주제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게, 물고기, 가족을 다룬 자전적 요소가 한층 두드러진다.
이중섭의 1955년 작'시인구상의 가족' 사진=케이옥션 제공 |
이중섭은 1955년 초 미도파화랑과 대구의 미국공보원에서 잇따라 개인전을 열며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가족들과 재회를 꿈꾸었다. 당시 전시는 외연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작품 판매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일본에 있는 가족과의 만남은 실패했다. 재회의 희망이 좌절된 후 절망 속에서 제작한 작품이 있다. 바로 ‘시인 구상의 가족’이다. 가족의 일상 이야기에 서정적인 이미지를 접목한 그림으로 단아하고 깊은 맛을 낸다.
실제로 이중섭은 서민들의 전통적인 가족 일상에서 예술을 뽑아냈다. 색채는 다소 어두운 편이지만 그 속에는 가족적인 미감이 살아 움직인다. 이른바 ‘가족애의 미학’이다.
이중섭이 1955년 가족사랑을 온몸으로 색칠한 득의작 ‘시인 구상의 가족’이 경매 시장에 처음 나온다. 시인 구상에게 직접 선물한 이후 70년만이다.
케이옥션이 2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 본사에서 여는 세일행사에는 ‘시인 구상의 가족’을 비롯해 김환기의 1973년 뉴욕 시대 점화, 색채화가 앙리 마티스의 아티스트북,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 박서보와 하종현의 단색화 등 국내외 유명미술가들의 수작 130여점이 경매에 부쳐진다. 추정가만도 148억원에 달한다.
최근 이란과 이스라엘 간 충돌로 지정학적 긴장이 커진 데다 계속되는 인플레이션 우려 등으로 금이나 그림 같은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추세여서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훈풍이 불지 주목된다. 더구나 2022년부터 미술시장이 조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응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케이옥션은 이번 경매에 이중섭의 ‘시인 구상의 가족’을 경매 도록의 표지에 실어 한국 근대 미술의 콘텐츠를 키우는 전략을 내세웠다. 그만큼 작품성이 뛰어나면서 투자가치 역시 높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이 작품은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 소개돼 많은 관람자들의 감동과 공감을 얻어냈다.
제작 스토리도 탄탄하고 흥미롭다. 당시 오랜 친구인 구상의 왜관 집에 머물러 있던 이중섭은 구상이 자신의 아들과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고, 일본에 있는 아들에게 약속한 자전거를 사주지 못한 부러움과 안타까운 심정을 절절이 담아냈다. 손이주 홍보이사는 “구상에 따르면 자신이 아이들에게 세발자전거를 사다 주던 날의 모습을 이중섭이 스케치하여 ‘가족사진’이라며 선물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화면 왼쪽 끝에서 구상의 가족을 등지고 돌아선 여자 아이가 그려넣은 게 이채롭다. 이중섭은 아마 구상의 집에서 의붓자식처럼 잠시 머물던 소설가 최태응의 딸을 화폭에 담아내 어린 소녀와의 동병상련의 감정을 오버랩한 것으로 여겨진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연필 자국 위에 유화물감을 덧칠해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아낸 이 작품은 14억원부터 경매를 시작할 예정이다.
김환기의 1973년 뉴욕 시대 점화‘22-X-73 #325’ 사진=케이옥션 제공 |
한국미술시장의 대장주 김환기의 1973년 뉴욕 시대 점화‘22-X-73 #325’와 1955년 작 ‘산’ 도 새 주인을 찾는다. 35억원부터 응찰을 시작하는 김환기의 점화는 작고하기 1년전에 제작한 작품이다. 청회색조의 화면에 고요히 찍힌 점들은 한평생을 걸어온 그의 예술 인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화면을 가득 채운 점과 길게 뻗는 공백, 유동하는 선들의 조화가 화면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악화되는 건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회색조로 물들이며 지나간 삶을 관조하듯 붓질했다는 게 케이옥션 측의 설명이다.
해외미술가들의 주목같은 작품들도 줄줄이 입찰대에 오른다. 앙리 마티스의 아티스트북 (판화 20점 세트) ‘재즈’는 추정가 9억5000만~12억원에 춤품됐다. 희소성이 높을 뿐 아니라 국내 경매에는 최초로 선보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탈리아 화가 살보의 ‘11월’ 사진=케이옥션 제공 |
최근 해외 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화가 살보의 ‘11월’(9800만~1억5000만원), 일본 이사무 노구치의 ‘블랙 앤 블루’ (3000~6000만원), 헤르난 바스의 ‘The Make-Shift Fountain’ (2억3000만~3억원), 새로운 기하학적 추상 미술을 연구한 피터 할리의 ‘Uncharted’(1억9000만~2억6000만원), 제임스 진의 ‘Peel’ (4200~7000만원)도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나와 있다.
이 밖에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을 비롯해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의 추상화는 물론 행위미술의 대가 이건용의 퍼포먼스 작품, 이배, 남춘모, 최명영 등 국내 대표 작가들의 작품도 골고루 경매할 예정이다.
한국화 및 고미술 부문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지점·루무-地占·樓無’ (8000만~1억2000만원), 호암 이병철의 서예 ‘인재제일-人材第一’ (1700~4000만원), 운보 김기창의 ‘청록산수’(1800~3000만원), 청전 이상범의 ‘추경산수’ (1000~3000만원), 저선시대 도자기 ‘백자청화운룡문병’ (1000~2000만원) 등이 출품됐다.
출품작들은 경매 당일 24일까지 케이옥션 전시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케이옥션 회원(무료)으로 가입하면 서면이나 현장 응찰, 또는 전화나 온라인 라이브 응찰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또 경매가 열리는 24일 당일은 회원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경매 참관이 가능하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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