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이승윤 기자]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에 이른 경우 정신과 진단이나 치료 기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보험사의 보험금 지급 의무가 면책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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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대법원 청사/ 사진: 대법원 제공 |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A씨의 유족이 보험사 5곳을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4일 밝혔다.
A씨는 2018년 2월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당시 A씨는 과중한 업무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린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육아휴직을 신청했다가 업무 폭증으로 휴직을 연기한 뒤 철회할 정도였다. 근로복지공단도 A씨의 극단적인 선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이후 A씨의 유족은 보험사에 사망보험금 지급을 청구했지만, 보험사들이 모두 ‘A씨가 심신상실로 인한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며 거절하자 소송을 냈다.
재판 과정에서는 A씨가 심신상실이나 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통상 보험계약 약관에서는 보험을 든 사람(피보험자)이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에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면책 규정’을 두고 있다. 다만 피보험자가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보험금 지급 의무가 인정된다.
1ㆍ2심의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A씨가 순간적이나마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봐야 한다”며 A씨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A씨가 통상적인 업무 이외에도 감사 준비와 전산시스템 개발 등 업무가 폭증한 상태에서 정신적 공황상태를 일으켜 극단적인 선택에 이른 것으로 보이고, 그 외에 다른 원인은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반면 2심은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로서 각 보험계약에서 정한 면책사유에 해당한다”며 보험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A씨가 평소 건강했을 뿐만 아니라,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 진단이나 진료를 받은 적도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게다가 2심은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는 이유만으로 A씨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시 2심의 판단을 뒤집었다.
생전에 우울증 등의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사실이 없더라도 극단적인 선택에 이른 경위 등을 토대로 당시 심리 상황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확인하는 등 이른바 ‘심리적 부검’ 등을 통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렀는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A씨가 주요우울장애를 진단받거나 치료받은 사실은 없지만 극심한 업무스트레스를 호소했고 주요우울장애 증상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며 “이런 사정에 비춰 보면 A씨가 주요우울장애를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됐을 여지가 없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원심 판단에는 보험계약 약관의 면책 예외사유 해석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승윤 기자 le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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