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파인그라스에서 열린 국민의힘 전·현직 지도부 초청 만찬에서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 등과 함께 걷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
백화점 세일행사에 가보면 이월상품 옆에 신상품이 같이 놓여 있다. 소비자 동선을 노린 판매전략이다. 패션에 민감한 고객은 가격이 비싸더라도 신상품에 손이 가게 된다. 세일상품을 별 볼 일 없게 만든 ‘신상효과’라고 할 만하다.
지난 23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총선 참패의 책임을 자처했던 한동훈 후보가 62.8%의 압도적 득표율로 새 대표에 당선된 배경에는 ‘신상 프리미엄’이 있었다고 본다.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총선 참패의 주역이라는 딱지가 엄연히 붙어 있는 데다 당내 기반도 약한 한 후보가 친윤계 지지를 업은 원희룡 후보를 3배가 넘는 표차로 따돌렸다는 것은 변화를 바라는 당심이 아직 완전 개봉되지 않은 신예에 대한 호기심 내지는 기대감과 맞물려 압도적 지지로 나타났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미 익숙한 ‘현역 프리미엄’도 아닌 ‘신인 프리미엄’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다. 당내 주류인 친윤계와 어떤 역학관계를 유지하며 차기 대권고지까지 갈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비근한 예로, 경기도지사 시절만 하더라도 변방의 정치인으로 인식됐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7인회’를 당내 교두보로 삼아 지금처럼 제1야당의 ‘일극체제’까지 굳히게된 과정을 벤치마킹할 수도 있다. 23일 국민의힘 전대 직후 서울 영등포의 한 보쌈집에서 한 대표와 만찬을 같이하기 위해 모인 10여명의 측근 의원들에게서 7인회의 싹이 엿보인다. 다만 비명계 공천 물갈이가 가능했던 총선 같은 기회가 2027년 대선 전에는 없다는 게 차이점이다. 유력한 대권주자로서 가질 수 있는 흡입력만으로 당내 기반을 확장하고 친윤계를 친한계로 바꿔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친윤계의 실질적 수장인 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이 최대 변수다. 많은 언론도 ‘당정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최악의 결과는 분당이고 최선의 결과는 정권재창출이다.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이미 나와있다. 양측이 ‘분당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시너지효과를 내 정권재창출에 성공하는 것이다.
보수정치권에서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이 공존했던 최근 사례는 이명박(MB) 정권 당시 박근혜 의원이 여당 내 비주류로서 친박계를 이끌던 때였다. 두 사람은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치열하게 맞붙는 과정에서 소속 의원들은 친이계와 친박계로 ‘줄세우기’했기 때문에 두 진영의 배타적 경계는 분명했고 이후 10년 넘게 보수진영을 양분했다.
친이계는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 ‘학살공천’으로 당 장악을 시도했지만 친박계의 탈당과 친박·무소속 출마 및 당선으로 실패했다. 선거 뒤 친박계 복당으로 ‘한지붕 두가족’이 됐지만 정권재창출이란 공동 목표를 위해 더 이상 분당선을 넘지는 않았다.
양측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2009년 정기국회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세종시 수정안 처리 때였다. MB는 그해 11월 세종시 공약 파기를 공식 사과하고 이듬해 3월 세종시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박 의원은 2010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 수정안 반대토론에 직접 나서 수정안 부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세종시는 원안대로 건설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것이 2012년 12월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충청권에서 5년 전 MB가 얻었던 득표율보다 16.9%포인트 더 많은 지지를 얻는 발판이 됐다.
시간이 갈수록 대세는 미래권력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 임기가 오는 11월 절반을 넘어서고 레임덕이 가속화하면 그런 경향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이번 전대를 한 대표와 윤 대통령 간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사생결단 식으로 직접 맞붙었던 ‘2007년 경선’과는 다르기 때문에 친윤계와 친한계 사이 문턱도 그다지 높지 않다. 한 대표가 중도하차하는 일이 생기거나 그에 필적하는 대항마가 조기 부상하지 않는 이상, 친윤계의 ‘말갈아타기’는 늘어날 것이다.
한 대표 리더십의 중대 시험대는 2026년 6월 지방선거가 유력하다. 향후 2년 동안 중도층으로 외연 확장에 얼마나 성과를 내느냐에 따라 선거 승패가 달려 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과 소통이 가능한 여당 대표라는 이점을 살릴 수도 있겠지만, 필요하다면 ‘원활한 당정관계’는 포기될 수도 있다. 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가 20%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존 권력과 ‘차별화’ 없이는 중도표심에 호소력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이제 “나를 밟고 가라”고 주문을 외며 미래권력을 대해야 한다. 자기희생으로 정권재창출을 위한 밑거름이 되겠다는 각오 없이는 공멸의 길을 재촉할 수 있다. 24일 ‘삼겹살 만찬’에서 “한 대표를 외롭게 만들지 말고 많이 도와주라”는 말이 빈말이 돼선 안된다. 그것이 상생을 담보할 수 있는 선택이다.
권혁식 논설위원 kw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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