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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 짝 같은 인생"...조영남이 반세기 붓질한 알록달록 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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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7-29 15:54:59   폰트크기 변경      
다음달 7일부터 23일까지 장은선갤러리서 화업 50주년 기념전

작곡가와 가수로 활동해 온 김민기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의 오랜 친구 조영남은 갑자기 날아갈 듯 비보에 한동안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쳐다봤다. 김민기가 부른 ‘아침이슬’ ‘친구’ 의 선율이 뇌리를 스쳐가며 젊은 시절 둘 만의 아련한 추억들이 빗방울처럼 얼굴을 때렸다.

당시 서울미대 회화과를 다니던 김민기와 성악을 공부한 조영남은 음악과 그림을 모두 좋아한다는 공동 분모 때문에 어쩌면 더 친해졌을 지도 모른다.

조영남은 군생활을 하면서 시간만 나면 친구(윤여정)가 사는 미아리집 마룻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렸고, 미대생 김민기는 그 옆에서 온종일 통기타를 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음대생은 그림을 그리고, 미대생은 노래를 하는 묘한 상황이 우정을 더 깊숙이 밀어넣었다.

조영남의 그림은 그렇게 한 점 한 점 쌓여 무릇 예술이 됐다. 집안에 곳곳에 널그러져 그냥 버리기에도 부담스러웠다. 조영남은 그림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다. 김민기는 “전시를 하는 거지 뭐” 라는 해법을 내놨다.

조영남은 그 길로 그림 두 점을 들고 서울미대 교수 윤명로 화백과 김차섭 화백에게 찾아갔다. 윤 화백은 “넌 노래 안 했으면 화가가 됐겠다” 라는 뜻밖의 격려에 전시를 밀어붙이겠다는 의욕과 열정이 생겼다. 김민기가 전시를 기획했고 추천서도 써줬다. 조영남의 생애 첫 개인전은 이렇게 안국동 한국화랑에서 펼쳐졌다. 그 때가 1973년. 전시회를 끝낸 조영남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그림 제작활동을 시작했다. 문화계에서는 가수와 화가 활동을 병행한다고해서 그를 '화수(畵手)'라고 불렀다.

조영남의 '노인과 에펠탑'                                                                 사진=장은선갤러리 제공


‘화수’ 조영남의 반세기 미술인생을 펼쳐 보이는 전시회가 다음달 7일 서울 종로구 장은선갤러리에서 개막해 23일까지 열린다. 전시 제목을 '화업 50년...화투 짝 같은 인생‘으로 붙였다. 가수활동 틈틈이 구축한 50년간의 화업을 통해 '예술을 위한 예술'의 통념을 깨뜨리고 대중미술의 프리즘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자는 의도에서다. 친구 김민기를 떠나보내면서 역경과 성장의 혼돈 시대, 대한민국에게 음악을 통해 청년정신을 심어줬던 그를 깊이 존경한다는 마음도 담았다. 한여름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 줄 이번 전시에는 음악과 미술을 접목한 화투 그림을 비롯해 '아트뮤직'시리즈, 콜라주,조각품 등 30여점이 걸린다.

그는 “음악과 미술의 경계에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을 비롯해 마르셀 뒤샹, 로버트 라우션버그, 앤디 워홀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업을 탐구하며 인생 막판까지 죽을 각오로 ‘K-아트의 꽃’을 피우려고 한다”고 말했다.

서울 용문고 재학시절 미술부장을 맡아 처음 붓을 들기 시작한 그는 50년 동안 음악과 함께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어왔다. 1973년 인사동에서 첫 전시회를 연 그는 보테가갤러리를 비롯해 비너스갤러리, 청담 PICA 등 국내외에서 50여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또 부산 현대미술관 ,LA아트쇼, 인사아트페어,광주비엔날레 특별전-한국특급전, 아시아 아트 페스티벌 등에 참가하며 국제적 위상을 다졌다. 2006년 7월에는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미술안내서를 내기도 했다.

그는 평생 ‘재미 아트’란 측면에서 현대미술을 소화해 냈다. 그의 의식 속에는 삶, 일, 재미, 놀이가 하나로 공생한다. 그가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을 거부하고 “예술은 곧 재미이며 모든 이가 예술가”라고 주장한 것도 ‘예술과 재미의 일치’를 평생 추구한 행동주의자로서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뒤샹과 워홀이 통상적인 예술에 대한 반(反)개념으로 ‘레디 메이드(기성품)’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면 저는 많은 사람이 즐기는 놀이와 일, 삶의 편린을 미술에 편입시킵니다.” 예술이 예술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 각 영역 간 상호 소통 및 순환이 이뤄져야 그 존립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종영남의 '극동에서 온 꽃'                                                      사진=장은선갤러리 제공 


그래서 그가 선택한 그림 소재는 화투,바둑,바구니,코르크,태극기 등이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대상을 화면에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한지를 돌돌 말아 만든 바둑돌,대바구니,요강,싸리나무 등은 한국인의 정서를 잘 대변해주면서 민화적인 요소도 담고 있다.

한국인이 늘 즐기는 화투 놀이, 바둑에서 한국만의 팝아트를 찾아낸 셈이다. “조선시대 김홍도의 풍속화나 고구려 벽화에 윷놀이,고싸움,투호,사물놀이 등이 등장하듯 평범한 놀이에 숨겨진 미학적 가치를 되살려내고 싶거든요. "

실제로 알록달록한 화투 그림은 일장춘몽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그의 그림은 미국에서도 제작기법이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창작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많은 관람객들이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며 “최근에는 음악보다 휠씬 강도 높은 열정으로 그림을 그리며 한국적인 팝아트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들 역시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대상을 활용해 독창적인 미감을 살려낸다. 가령 붉은 띠를 두른 화투의 흙싸리를 활용해 예수의 계시를 녹여냈고, 화투 꽃무늬를 활용해 화병도 그렸다. 화투를 싣고 달리는 황소와 말 그림은 이중섭의 작품 ‘길 떠나는 가족’을 패러디해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우리의 전통놀이가 아니라 19세기 일본에서 전해진 화투를 주 소재로 활용한 이유가 궁금했다.

조영남의 '극동에서 온 다솟송이의 화투 꽃'               사진=장은선갤러리 제공 


“비, 광, 흑싸리, 청단, 홍단 등 화투 이미지에 우리 사회의 희망을 패러디해 보고 싶었던 거죠.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화투를 좋아한다고 생각을 했고요. 일본의 놀이 기구인데 밤을 새워가며 즐기는 한국인의 이중성이 매우 흥미롭기도 했어요.”

그는 팝아트라는 미술 장르를 선택한 것에 대해 “생태적으로 ‘파퓰러(popular)’ 가수이니까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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