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부 권고 90일 미달 사례 속출
시급성 등 인정 경우에만 단축 허용
발주기관별 사정따라 고무줄 조정
“준비기간 태부족”…업체들 포기
[대한경제=전동훈 기자] 최근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건축설계공모에 참가한 일부 업체 사이에서 설계안 준비 기간이 너무 짧다는 이유로 등록 후 제출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설계 복잡성이 상당히 높은 고난이도 특수 설계 프로젝트마저 공고일부터 공모안 제출 마감일까지의 기간이 국토교통부 권고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하며, 발주기관이 졸속 설계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다.
1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올 하반기 공고한 일반공모 방식의 ‘서울영등포 공공주택지구 S-1BL 건축설계공모(29억원ㆍ이하 설계비)’, ‘서울시 다목적체육센터 및 어린이공원 설계공모(37억원)’의 설계 기간은 각각 48일과 52일로 국토부 권고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현행 ‘국토부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은 ‘공고일부터 공모안의 제출 마감일까지의 기간은 90일 이상으로 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서울시가 발주한 설계안 준비 기간이 권고 기준에 한참 미달하는 셈이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대다수 공공건축은 지자체장의 공약사업으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고, 올해 확보한 예산을 이월 없이 소진하려다 보니 공기가 비교적 촉박하게 설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발주기관이 국토부의 권고기준을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현행 지침상 허점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국토부는 사업의 특성과 시급성을 감안해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 준비 기간을 45일 이상으로 단축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뒀다. 또, 긴급 추진이 요구되는 국가 및 지자체 사업인 경우 계약부서장이 기간을 따로 정할 수도 있도록 열어줬다.
발주기관이 이 조항을 악용해 각자 사정에 따라 설계안 준비 기간을 고무줄처럼 조정하며 업체들을 압박하는 셈이다.
발주기관의 이 같은 ‘갑질행정’이 관행처럼 자리 잡으며 건축설계업계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서울의 중소 A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설계 일정이 촉박해질수록 안전성, 시공성, 친환경성 등은 뒷전이 되기 십상”이라며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졸속 설계를 앞장서 부추기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특수 설계가 필요한 프로젝트마저 국토부의 단서 조항이 악용되며 업계는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짙다.
지난 7일 경상남도가 공고한 ‘경상남도 서부의료원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 설계공모(42억원)’는 설계 기간이 62일에 불과했다.
통상 의료시설 설계용역은 수술실, 의료장비 배치 등을 고려한 특수설계가 필요해 작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분야로 손꼽힌다.
경남 서부의료원과 설계비 규모와 건물 기능이 유사한 ‘대구의료원 통합외래진료센터 건립 설계공모(43억원)’ 역시 설계 기간이 59일에 그쳤다.
대형 건축사사무소 B사 임원은 “병원설계의 특수성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발주기관의 입찰 및 예산 소진 일정에만 맞춰 급급하게 발주된 점이 드러나는 사업”이라며, “병원 프로젝트에서 이런 식의 졸속 설계가 이뤄지면, 추후 시공이 진행될 때 동선 및 전기 배선 등에서 문제가 발생해 변경 시공이 잦아지고 결국 사업 예산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업계는 국토부가 양질의 설계안 준비기간을 확보하도록 강제해, 국가 예산이 적정하게 집행되고 젊은 건축 인력들이 설계 시장에 꾸준히 유입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C건축사사무소 임원은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설계공모 과정에서 최장 1년간 준비 기간을 주기도 한다”며 “짧은 준비 기간으로 인해 밤샘 작업이 일상화되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설계 인력 유출 속도가 가팔라지는 추세”라고 꼬집었다.
한동욱 남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건축공간연구원, 대한건축학회 등 학계ㆍ연구계가 중심이 되어 건축물 규모나 기능, 특수성을 고려해 보다 세분화된 적정 설계 기간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전동훈 기자 j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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