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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엣것이야, 너희가 앞에것이 되어야지.”
이 말은 지난 7월 24일에 작고한 가수 겸 뮤지컬 연출가 고(故) 김민기 님의 말씀 중 하나이다. 김민기 님은 수많은 곡을 작곡하고 작사했으며, 직접 음유시인처럼 조용하고 나지막한 저음으로 자작곡을 읊조리며 노래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뮤지컬 등 총 350개가 넘는 연출을 하셨다.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다니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저런 겸손과 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낮추는 미덕의 말씀까지 하셨다는 것을 보면, 천재를 뛰어넘어 진정한 휴머니스트임이 확실하다.
특히 요즘처럼 자신이 잘났다고 앞으로 나서기 위해 안달하며 서로 경쟁을 일삼는 이 사회에서, 자신은 뒤로 물러서 타인을 배려하고 기꺼이 그들의 길을 밝혀주고자 했던 김민기의 덕성(德性)스러운 마음은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경종을 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1951년에 태어난 김민기는 서울대학교(미대)에서 예술을 수학(修學)하고, 1970년대 민주화를 외치며 유신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들이 교가처럼 부른 ‘아침이슬’을 작사, 작곡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수감 생활을 한 바 있다. 당시 정권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농촌으로, 공장으로 피해 다니며 험난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는 운동가를 자처한 적도 없었고, 특정 이념을 주장한 적도 없다. 전혀 선동의 목적 없이 그저 자신의 생각을 조용히 음악으로 표현했을 뿐인데, 누군가가 선창하면 따라 부르고 싶게 만드는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떼창’의 원조였다고나 할까? 요즘 사람들이 다 함께 부르는 노래를, 떼를 지어 부르니 ‘떼창’이라고 하는데, 그의 노래는 묘하게도 듣는 이들의 감정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조용히 혼자 읊조렸던 그 가사의 내용이 그 시대의 함성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기 ‘아침이슬’의 가사를 몇 구절 적어본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대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넓은 광야로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사람들도 이 노랫말에서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을 느낄 수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인 이육사나 윤동주의 비유와 은유를 통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같은 맥락이다. 자유를 갈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감시의 대상이 되어 황금 같은 청춘에 그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 많은 주옥같은 명곡들을 우리가 듣고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 이는 국가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감시를 받으며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유랑 생활 속에서도 음악적 재능을 통한 그의 선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공장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결혼하지 못한 노동자들을 위해 합동결혼식의 축가로 ‘상록수’를 만들었다. 여기 ‘상록수’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이 노래 가사 역시 그 시대의 힘겨운 노동자들의 삶에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심금을 울리는 가사이다.
또한, 방직 공장 노동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자 ‘공장의 불빛’을 작사, 작곡했는데, 당시 불법이라는 정부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송창식 가수의 도움을 받아 몰래 그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여 노동자들에게 전파했다고도 한다.
1984년 LA 올림픽 때 메달권 진입에 실패하여 좌절에 빠진 이들을 위해 작사한 ‘봉우리’는 그들을 교육하려 하지 않고 조용한 위로를 전한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며,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여긴지도 몰라. 여기 숲속에 좁게 난 길, 높은 곳에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 외에도, 막걸리 두 말을 받고 퇴역하는 군인을 위해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 ‘친구’, ‘꽃피우는 아이’ 등 수많은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에 그 암울하고 험난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자 하는 그의 선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처럼 자연을 노래하듯 서정적이고 애잔하며, 때로는 한없이 서러우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힘찬 메시지를 던져주는 진정한 박애주의자.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김민기의 노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화로 해금된 후, 그는 잠시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도 했으나, 1993년 ‘학전’이라는 소극장을 개관하여 현재에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김윤석, 장현성, 이정은 등 770명에 이르는 훌륭한 배우들을 대거 배출했다. 1990년대 댄스 음악의 흥행으로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가 사라지자, 김광석, 윤도현, ‘여행스케치’, ‘강산에’ 등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마음껏 노래하라며 학전의 무대를 흔쾌히 제공해 주었다.
특히 김민기는 티 없고 순수한 어린이들을 위한 많은 뮤지컬을 창작하고 공연했는데, 수익이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으로 어린이 창작극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결과 학전은 결국 경영난과 그의 건강 악화로 인하여 폐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후배 예술가들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의해, 학전은 ‘아르코’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으니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암울한 시대에 저항하며 살아가던 청춘들에게 자신의 노래로 정신적 위로와 살아갈 희망을 준 가객 고(故) 김민기!
시인 김지하는 김민기를 “쓸쓸함, 맑음, 쾌활함,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없는 쓸쓸함을 관통하는 티 없는 맑음 때문에 어둠이 오히려 씩씩한 쾌활함으로 바뀐다”고 표현했다.
또한, 소리꾼 장사익은 김민기를 “그가 꽃이라면 안개꽃이다”라고 말하며, “그 이유는 다른 꽃들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가 영면한 지난 7월부터 오늘까지도 수많은 일반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글과 노래를 헌정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업적은 계속 회자되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살아서 ‘앞엣것’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뒤엣것’이 되기를 원했던 그이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영원히 ‘앞엣것’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신혜숙 화예 작가 (신디 테라스 대표, 前 서울 로타리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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