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2026년 의대 증원 유예’를 제안하고 대통령실이 이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윤·한(윤석열 대통령·한 대표) 갈등’이 다시 국민적 시선을 끌고 있다. 시작은 한 대표가 지난 25일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정부 측에 2026년 의대 모집정원 증원을 보류하자고 제안한 것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였다. 의대 증원에 반발해 현장을 떠난 전공의를 달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게 한 대표 측 설명이다.
하지만 대통령실과 정부는 한목소리로 수용 불가 입장을 밝혔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27일 기자들과 만나 “의대 증원에 관한 정부 입장은 2025∼2029학년도 5년간 매년 최대 2000명씩 최대 1만명을 증원하겠다는 것”이라며 “의료계가 ‘과학적이고 통합된 의견’을 가져오면 재논의할 수 있다는 정부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한 대표는 같은 날 페이스북 글에서 공개적으로 증원 유예를 거듭 주장했다. 다음날인 28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선 “국가의 임무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어떤 것이 정답인지 그것만 생각하면 될 것 같다”면서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윤 대통령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이 예정된 29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정부의 의료 개혁은 중요한 국가적 과제다. 다만 그 추진 과정에서 국민의 걱정과 불안감도 잘 듣고 반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공백 장기화에 따른 국민 걱정과 불안감을 감안하면 자신의 ‘유예안’이 수용돼야 한다는 뜻이 깔려 있다.
‘윤ㆍ한 갈등’을, 한 대표도 “낄 자리가 없고 사치스럽다”고 표현한 ‘당정 갈등 프레임’으로 보면 식상하고 본질에 접근하기도 어렵다.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관계로 접근하는 게 더 유용하다. 장기적으로는 현재권력이 무대에서 내려오고 미래권력이 전면에 나서는 시기가 오겠지만, 지금은 시기상조란 점에서 한 대표의 이번 언행은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한 대표는 ‘의정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증원 유예’ 카드를 끄집어냈지만 객관적인 관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난 2월 2000명 증원 발표 이후 지난 6개월 간 정부와 의사단체가 증원 여부 자체를 놓고 힘겨루기를 해온 마당에 사실상 ‘증원 포기’와 다를 바 없는 안을 내밀며 정부더러 수용하라고 하면 백기항복을 하지 않은 이상 어떻게 받겠는가. 본인은 ‘의료 개혁의 본질과 동력을 잃지 않는 선’에서 제시한 대안이라고 강조하지만 “의사 증원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와 같다”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항변에 훨씬 공감이 간다. 일방적으로 한 쪽의 양보를 요구하는 안은 중재안 요건에 미달된다.
“당이 민심을 전하고, 민심에 맞는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는 한 대표 말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러나 25일 당정협의회에서 처음 제안했을 때 대통령실과 정부 반응이 부정적이라는 게 확인됐는데도 그걸 언론에 흘리며 이른바 ‘언론플레이’에 나섰던 의도는 무엇인가? 대통령실이 화들짝 놀라 뒤늦게라도 두손 들고 수용할 것이라는 기대했을 정도로 한 대표 측 정치감각이 순진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중재 노력이 대통령실 거부로 사장되는 게 아쉬워 혼자라도 점수를 따야겠다는 생각에서 단독플레이에 나선 것인가. 김경수 전 경남지사 복권을 둘러싼 입장차에 이어 지금처럼 윤한 갈등이 계속 불거지면 이른바 ‘차별화’에서 오는 득(得)보다 내부 분란자라는 인식에서 오는 실(失)이 더 클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면 한 대표의 정무적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 대표는 본인 제안의 명분으로 ‘국민 걱정과 불안감’을 거론했지만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격이다. 국민이 의료공백 장기화에 따른 불편과 불안감을 호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 절대다수가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것 또한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윤 정부가 보다 치밀한 대책 없이 대규모 증원을 밀어붙여 사태가 장기화하는 데 대한 불만과 우려가 있지만 그렇다고 의대 증원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닌 게 다수 민심의 현주소다. 한 대표가 제대로 민심을 좇겠다면 의대증원 원칙을 살리면서 의료공백을 조기 종식할 수 있는 묘책을 들고나와야 한다.
한 대표는 앞서 국민의힘을 이끌었던 이준석 전 대표(현 개혁신당 국회의원)의 전철을 밟아선 차기 대권 가도에 안착하기 어렵다. 탄탄한 내공과 현란한 말솜씨, 번뜩이는 재치 등에서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지만 이 전 대표가 왜 보수 지지층으로부터 멀어졌는지 분석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피 말리는 20대 대선 정국에서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과 갈등으로 자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을 흔든 게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자제할 수 없는 총기(聰氣) 발산이 결과적으로 전체의 이익을 위태롭게 할 때는 ‘내부총질’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차기 대권주자인 한 대표로선 윤 대통령과 차별화는 언젠가는 가야할 길일 수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임기 반환점도 돌지 않은 대통령을 향해 총력전을 펴고 있는 개혁과제를 포기하고 사실상 백기를 들라고 압박하는 것은 당정 갈등 차원을 넘어 ‘내부총질 프레임’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지금은 당정이 한배를 타고 있다는 심정으로 민심의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 역대 정권의 전례에 비춰 차별화는 임기 후반에 배 밑창에 물 들어올 때 시작해도 늦지 않다.
권혁식 논설위원 kw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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