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건축물에 하자가 존재하는지는 원칙적으로 건물의 품질이 통상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여 구조적ㆍ기능적 결함이 있는지를 바탕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계약 내용, 설계도, 관계 법령의 기준 등은 품질 불량을 확인하기 위한 요소들일 뿐이다.
지난 칼럼에서는 준공도면이나 현장시방서에 액체방수 두께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경우의 합리적 판단 기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건물 설계 당시 작성된 현장시방서에 두께 기준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장시방서는 공사 계약의 내용이라 볼 여지가 있으며, 건축물의 설계도서 작성 기준이 규정한 해석 순위에 비추어 보더라도 표준시방서에 우선 적용된다. 따라서 현장시방서에 명시된 액체방수 두께 기준은 하자 판단의 강력한 근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장시방서의 액체방수 두께 기준이 합리성을 결여하였음이 분명하다면 이를 근거로 하자를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지가 문제된다. 현장시방서는 액체방수 두께 기준을 벽 10㎜, 바닥 20㎜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1999년 이전의 표준시방서 기준인 벽 6㎜, 바닥 10㎜에 비추어 보더라도 지나치게 보수적인 기준이다.
만약 설계사가 이와 같이 보수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에 합리적 이유가 있다면 현장시방서를 기준으로 하자를 판단하는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액체방수 두께가 방수 성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학계 전반의 시각에 비추어 볼 때, 설계사가 현실성이 떨어지는 기준을 제시한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장시방서의 액체방수 두께 기준이 문제되는 사건의 건축물이나 공사비 규모를 살펴보면 설계사의 전문성이 부족해 보이는 곳이 많아, 설계사가 과거의 자료를 참고하는 과정에서 관계 법령 변화나 방수 성능에 대한 고려 없이 관행적으로 현장시방서를 작성한 것은 아닌지 의심되기도 한다.
당사자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의 내용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내용이 합리성을 결여하여 오기 내지는 착오에 의해 포함된 것에 불과함이 분명하다면, 이를 근거로 계약 내용 준수를 강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한 현장시방서의 기준을 계약 내용으로 보더라도 결국 건축물에 하자가 존재하는지는 건물의 품질을 바탕으로 판단되어야 하는바, 시공된 액체방수 두께가 비현실적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였다는 사실만으로 당연히 하자로 볼 수는 없다(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장시방서와 같은 기준 역시 결국 품질 불량을 확인하기 위한 한 요소일 뿐이다).
그렇다면, 방수층에 하자가 존재하는지는 실질적으로 건물에 누수가 발생하는지를 바탕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판단 과정에서 품질 발현 확인을 위한 두께 기준이 필요하다면, 특별한 이유 없이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설정된 현장시방서 기준보다는 일반적인 표준시방서 또는 시공된 자재의 특성을 고려하여 합리적인 수준을 제시한 제품설명서를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원이 지금까지 액체방수 두께 부족에 대해 과거 표준시방서나 불합리한 현장시방서 기준을 근거로 관행적으로 판단해온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법원 역시 이제는 자신들의 관행적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이 부분 하자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서울고등법원은 최근 액체방수제의 자재시방서가 특기시방서에 해당한다고 인정하였는데, 법원의 이 같은 입장 변화는 건축물의 품질을 기준으로 합리적 판단을 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다. 원칙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판단하겠다는 법원의 입장 변화를 환영하며, 이와 같은 움직임이 앞으로 건설 하자 소송 전반으로 퍼져나가길 바란다.
정홍식 변호사(법무법인 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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