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재현된 김환기 화백의 220m 예술
DDP 개관 10주년…박제성ㆍ윤상 ‘천재’ 연출가 손잡아
8분 동안 관객에게 70년∼50년대 시간 여행 선사
29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외벽에 ‘서울라이트 DDP 2024 가을’ 미디어 아트가 나오고 있다. 오는 8일까지 매일 오후 8시에서 10시까지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의 작품을 재해석한 ‘시(時)의 시(詩)’가 DDP 외벽에 전시된다. / 사진 : 안윤수 기자 |
[대한경제=박호수 기자] “김환기 선생님 작품에 누가 되진 않을까 걱정했어요. 8분짜리 곡을 만드는 작업인데 꼬박 두 달 반이 걸렸죠. 작업 시간만 100시간이 넘었고, 다섯 차례 이상 수정을 거쳤습니다. 저에겐 큰 도전이었습니다.”
지난 29일 서울시가 주최하고 서울디자인재단에서 주관하는 빛의 축제 ‘서울라이트 DDP 2024 가을’ 개막식 행사에서 음악 연출을 맡은 윤상(56)이 이같이 말했다. 재단은 올해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관 10주년을 맞아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 작가의 작품을 재해석한 미디어아트 전시를 공개했다. ‘퓨처로그(Future Log): 빛으로 기록하는 미래’를 주제로 이뤄지는 이 전시는 지난해 관람객 116만명을 기록하며 명실공히 서울을 대표하는 초대형 미디어파사드 축제로 자리 잡았다.
이번 프로젝트는 영상과 음악계 두 천재의 협업으로 시작 전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영상연출을 맡은 미디어 아티스트 박제성 서울대 교수가 전체 길이 220m의 거대한 DDP 외벽에 형형색색의 빛을 투사해 김 화백의 작품을 역동적인 영상으로 구현하고, 음악감독인 윤상은 여기에 배경 음악을 입혔다. 이들이 만든 미디어아트 ‘시(時)의 시(詩)’는 오는 8일까지 DDP의 가을 밤하늘을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일 예정이다.
한국 현대 미술의 과거와 미래, ‘시(時)의 시(詩)’
故 김환기 작가가 파리 유학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렸던 그림 ‘성심’을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한 작품이 DDP 외벽에 펼쳐지고 있다. / 사진 : 안윤수 기자 |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문학을 좋아하고 서정성이 넘쳤던 화가 김환기(1913~1974)는 유독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가장 존경한 시인이 바로 김광섭이다. 김광섭은 1905년생으로 와세다 대학 영문과 출신의 수재였는데, 일제강점기 중동학교 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반일 감정을 주입했다는 이유로 3년 8개월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지냈다. 해방 후에는 해방 후에는 문예지 자유문학을 발간을 맡았다. 시 ‘성북동 비둘기’가 그의 대표작이다. 그런 그를 각별히 따랐던 김환기는 뉴욕에서 김광섭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한다.
뉴욕에서 점화를 그리고 있는 김환기 작가. / 사진 : 환기재단 제공 |
큰 실의에 빠진 그는 고향집에서 듣던 뻐꾸기 울음소리를 생각하며 끝도 없이 캔버스에 점을 찍기 시작한다. 밤하늘의 별처럼 푸른 점을 빼곡하게 그려 넣었다. 한 점 한 점이 그리움이었고 슬픔이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시(時)의 시(詩)’의 영상 도입부에 구현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다. 이날 윤상은 “처음 봤을 때 가장 충격적인 작품이었다”라며 “작가가 40년 넘도록 탐구한 ‘인과 연’에 대한 고민, 예술과 사색적인 물음 등을 음악에 녹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거대 우주선을 캔버스 삼아 춤추는 작은 점들의 향연
서울라이트 DDP 2024 개막식에 참가한 시민들이 미디어 파사드를 관람하고 있다. / 사진 : 안윤수 기자 |
오후 8시. DDP 주변에 어둠이 드리워지자 서울라이트를 감상하기 위해 시민들은 어울림광장 한 가운데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우주선 모양의 DDP가 캔버스가 됐고, 그 주위로 관객들은 자유롭게 돗자리를 깔고 앉거나, 누웠다. 그리곤 이내 50년 전 작품들과 빛의 시간 여행을 떠났다. 작가가 화폭에 끝없이 서로 다른 점을 찍으며 막막하게 불렀을 멜로디가 마치 느껴지는 듯, 시종일관 잔잔하면서 신비로운 음악도 전시에 집중도를 높였다.
영상은 김 작가가 1950년대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그렸다는 ‘성심’으로 마무리된다. 박 감독은 “올해는 김 선생 사후 50주기가 되는 해라 더욱 뜻깊다”며 “가장 정제됐던 1970년대 작품에서 출발해 가장 순수하게 마음을 드러냈던 1950년대 작품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되살아나는 에너지와 생명력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작가가 수행하는 마음으로 무수한 점을 찍으며 보냈던 시간들, 그가 이끌어온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갈 미래의 시간들.’ ‘시(時)의 시(詩)’는 이러한 뜻을 중첩해서 담고 있다. 김환기 작가가 자신의 일기에 쓴 것처럼, 이날 도시에 펼쳐진 수많은 점은 하늘 끝에 가 닿았을까.
잔디 밭 4m 대형 하트 미러볼은 ‘MZ 놀이터’
디스코볼에서 영감을 얻은 초대형 하트 미러볼 ‘아워 비팅 하트(Our Beating Heart)’가 DDP 잔디 언덕에 전시돼 있다. / 사진 : 안윤수 기자 |
한편 같은 기간 DDP 곳곳에선 해외 유명 작가들의 전시, 아트토크&투어, 현대미술 포럼 등이 준비된 ‘DDP 디자인&아트’가 함께 열린다.
단순 전시장에 작품을 거는 것이 아닌 DDP 안팎 공간 전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다. 물감 대신 빛과 색을 사용한 독특한 조형물들이 넘쳐나 ‘MZ’들의 인증샷 성지가 될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우선 DDP 잔디 언덕에는 하트 모양의 조형물인 ‘아워 비팅 하트(Our Beating Heart)’를 설치됐다. 영국의 디자이너그룹 ‘스튜디오 버티고(Studio Vertigo)’의 작품으로 1.8m 크기의 하트 모양 조형물을 만들고 작은 거울 조각 1만1000개를 붙였다. 이를 4.8m 높이 봉 위에 올린 뒤 주변에서 다양한 조명을 쏘면서 몽환적이고 클럽에 온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낮보다 밤에 아름답다.
스위스 출신 ‘착시(錯視) 화가’ 펠리체 바리니(Felice Varini)의 ‘색 모양 움직임’을 체험하고 있는 시민들. / 사진 : 안윤수 기자 |
DDP 내부의 둥그런 통로에는 스위스 출신 ‘착시(錯視) 화가’ 펠리체 바리니(Felice Varini)의 신작 5점이 설치됐다. 바리니는 건물이나 공간에 다양한 형태의 선을 그려 관람객의 착시를 유도한다. 재단 관계자는 “관람객이 오가는 통로 전체가 작품이 되는 것”이라며 “통로를 천천히 걸으며 작가의 유쾌한 착시 아이디어를 즐기면 된다”고 했다
액자식 구멍 배열이 눈에 띄는 체험형 아트 ‘아퍼쳐(Aperture)’ 조형물 / 사진 : 안윤수 기자 |
DDP 공원부에는 호주 시드니 기반 예술그룹 아틀리에 시수(Atelier Sisu)의 ‘아퍼쳐(Aperture)’가 전시된다. ‘톰과 제리’가 좋아하는 에멘탈 치즈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이 설치물이다. 특히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에게는 완벽한 놀이터다.
‘서울라이트 DDP 2024 가을’은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정각ㆍ30분에 외벽 전면에서 만날 수 있다. 글로벌 아티스트들의 독특한 설치물은 상시 관람이 가능하다.
박호수 기자 lake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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