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에서 태동한 실존주의 사상은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모든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대의를 품고 있다. 다시말해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라는 사실을 파고들었다. 19세기 중엽 덴마크의 키르케고르와 프로이센의 니체가 처음 주창한 이 사상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메시지로 압축되며 글로벌 지성을 강타했다.
오원배 화백의 2024년작'무제' 사진=아트사이드갤러리 제공 |
70대 인기화가 오원배는 이런 인간의 실존에 대한 탐구를 미학적으로 승화한 작가로 유명하다. 50년 화업 내내 거대한 제도와 권력 앞에 선 예술가의 저항을 실존미학으로 화면에 풀어낸 그였다. 인간의 몸짓과 신체를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의 용기(container)’로 접근하며, 사회의 모순과 굴곡진 역사를 색채 미학으로 버무려 국내외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오 화백이 다음달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트사이드갤러리템포러리에서 펼치는 개인전 ‘치환, 희망의 몸짓’은 인간의 실존을 화두로 삼고 평생 몸부림치며 작업한 미학 세계를 보여주는 자리다. 현대사회의 육중한 무게에 짓눌려 사는 인간의 몸짓을 사유와 성찰로 우려낸 근작 20여점을 걸었다. 얼굴의 측면과 몸체의 뒷부분 만을 집중적으로 잡아내 감각적 리듬감을 살려낸 작품들이다. 인간의 깊은 내면 세계와 우리 시대의 정신적인 좌표를 함께 짚어볼 수 있다.
오 화백은 “그동안 뒤틀려 있는 굵은 선을 통해 사회 체제에 종속된 인간의 무력감과 허무함을 터치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인체는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1953년 인천에서 태어난 오 화백은 동국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5년 프랑스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수료했다. 지난 50년 동안 300여회의 전시회를 통해 인간의 실존문제를 다뤄 파리국립미술학교 회화 1등상(1984년)을 비롯해 프랑스 예술원 회화 3등상(1985년), 올해의 젊은 작가상(1992년), 제9회 이중섭 미술상(1997년) 등을 잇달아 수상하며 K-아트의 국내외 위상을 과시했다.
현대인의 몸짓을 극병하게 드러낸 작품들은 한국 사회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관통하며 관람객을 반긴다.
몸통이 마치 하나의 축이 되어 돌아가는 역동적인 자세, 파이프 같은 모티프들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인물들을 마술처럼 포착했다. 삶의 고달픔에 지쳐 있지만 사람들의 몸짓에서 넘쳐나는 삶의 애환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미묘하게 변화된 선의 굵기에서는 속도감까지 집약돼 있다.
오 화백의 제작 기법 역시 흥미롭다. 많은 작품에서는 드로잉적 요소들을 화면에 끌어온 흔적이 보인다. 목탄화처럼 검정색의 음영만으로 옅게 칠해 투박하면서도 볼륨감 있는 근육의 해부학적 요소들을 놓치지 않았다.
작품에 부감법을 끌어들인 것도 시선을 끈다. 뒤로 넘어가는 듯한 상체의 움직임을 조망하기 위한 기법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작품 디스플레이와 공간 연출도 이색적이다. 작품들을 관람객들의 시선보다 아래쪽에 배치해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것처럼 꾸몄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출품한 길이 15m의 대형 작품도 볼거리다. 사람들의 몸짓들이 공간에서 유영하듯 회전하게 연출해 동적인 에너지를 살려냈다. 그래서인지 전시 공간 자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작품처럼 보인다. 작가는 “전시 공간과 작품의 긴밀성, 몰입감에 대해 몰두해 온 결과물”이라며 “공간과 다채롭게 변주하는 제 가변적인 작품들은 관람객들과 간격을 좁히며 쌍방향 소통을 이끌어낸다”고 설명했다.
금속성의 느낌이 나는 작품과 거울 종이‘미러지’를 사용한 작품들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다. 벽면에 설치된 작품과 달리 각도에 따라 실재를 왜곡하며 관람객이 위치한 공간을 비춘다.
인물을 사이에 관람객의 시선은 엉겅퀴나 호랑가시나무와 같은 식물들이 병치되어 변주적 형태로 나타나 메타포적 질문을 던진다. 관람객들 역시 극복 의지를 상징하는 생명체들로서 대비된 인물들과 어우러져 진정한 희망의 메세지를 읽는다.
이동재 아트사이드갤러리 회장은 “오 화백이 관람객을 위한 방식으로 작업한 각기 다른 작풍(作風)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고 진지한 해석을 감상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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