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단번에 빨아들일 듯한 강렬한 눈빛이 매섭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눈망울, 쭈글쭈글 이어지는 주름살은 마치 현미경 렌즈를 관통한 물체의 표면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얼굴 피부에서는 연민과 쓸쓸함이 배어있다. 북망산 정상까지 곧 다다를 것 같은 영적 시선은 날카로움을 넘어서 무섭다는 느낌마저 든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진실’이라는 믿음마저 흔들어 놓는다.
한국의 대표적인 극사실주의 화가 한영욱 씨가팔장을 낀 채 자신의 작품'페이스'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오케이엔피 제공 |
한국의 대표적인 극사실주의 화가 한영욱(62)의 인물-초상화에는 이처럼 인간 내면에 깊숙이 꽈리를 튼 실존적 가치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한영욱은 그동안 죽음, 사랑, 결핍에 대한 보상. 얘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을 강렬한 얼굴 그림을 통해서 일반인들과 소통해 왔다.
서울 중앙화단에서 2010년대 단번에 ‘스타’ 작가로 부상한 한씨가 모처럼 부산에 ‘예술 보따리’를 풀었다. 해운대구 그랜드조선부산 4층 전시공간 오케이엔피에서 다음달 24일까지 펼치는 개인전은 2000년 부터 ‘재현’이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숨차게 달려온 도전과 실험 정신을 ‘날 것’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추상미술이 판치는 국내외 화단에서 오로지 사진보더 더정교한 ‘재현 예술’만을 고집해온 그는 이번 행사에 인물화는 물론 동물, 군상, 풍경 등 다양한 극사실주의 작품 30여점을 한꺼번에 펼쳐보인다. 전시 제목도 ‘재현 미술을 위한 제언’으로 붙였다.
한씨는 “서구 미술 사조의 아류가 아니라 한국 고유 독창적인 극사실주의 화풍으로 승화한 작품들”이라며 “국내외 시장에서 명성을 얻게 된 데는 저를 사랑해준 미술애호가들의 공덕”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제 ‘재현 미술’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그의 당찬 각오가 방금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다가온다.
한영욱의 '페이스(FACE}' 사진=오케이엔피 제공 |
우선 화업 20여년만에 ‘재현미술’을 테마로 꺼내든 이유가 긍금했다.
“미술은 투시법과 명암법이 개발되면서 수세기 동안 발전을 거듭해 왔어요. 주술적인 의미와 함께 무엇인가를 기록, 전달하는 기능까지 더해져 그 입지가 공고했습니다. 하지만 사진기술의 발명과 함께 미술은 무엇인가를 재현한다는 고유한 지위를 고스란히 사진에게 넘겨주게 된셈이죠.”
한씨는 폴란드의 미학자 타타르키비츠가 말한 ‘미술 대이론의 종말’을 상기시키며 “미술은 이제 추상을 거쳐 다양한 실험의 각축장이 되었다”며 “재현 미술은 철 지난 양식으로 만 인식되는 현실을 재평가 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한씨는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40대 ‘늦깎이 화가’로 화단에 데뷔했다. 현대인들의 모방 본능을 얼굴에 표현한 독창성 때문에 전시회 때마다 컬렉터들이 몰려 작품이 잘 팔리는 몇 안 되는 ‘행복한 작가’다. 그의 작품 ‘얼굴(Face)’은 2010년 홍콩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추정가의 5배를 웃도는 47만5000홍콩달러(약 8500만원)에 낙찰돼 아시아 미술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한영욱 표’ 그림이 이처럼 인기를 끄는 까닭은 뭘까. 가장 큰 요인은 세대를 아우르는 ‘서민들의 표정’을 감성적으로 터치하는 것이다. 소외된 인간에서 느끼는 연민과 애환 등 풍부한 감성의 나래를 상상의 밑뿌리로 어루만진다. 작품 제목이 ‘페이스(FACE)’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에 접근한 것도 한 요인이다. 그는 “고향 춘천에서 자란 기억과 사람의 소중함에서 예술의 원천을 뽑아낸다”고 했다.
한영욱의 '스트레인저' 사진=오케이엔피 제공 |
“인간의 개별성을 살림과 동시에 보편성을 지향해 우리 심연에 있는 무엇인가를 꺼내려 매달렸습니다. 농부의 땀방울이 깃들 때 좋은 결실이 보장되듯 예술 역시 ‘영혼의 지문 같은 손맛’으로 쉼 없이 노력해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것 같아요.” 단순히 사실적으로 잘 그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가 캔버스에 수놓은 인물들은 어디선가 봤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넷이나 사진 자료를 통해 이미지를 조합해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기법의 특이함도 미술 애호가들을 끌어들이는 또 매력이다. 그는 캔버스 대신 알루미늄판을 화폭으로 사용한다. 금속판 위에 온몸을 던져 긁어 파내서 그 위에 색을 입히고, 지우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손맛이 가미된 그의 회화는 일반적인 그림들과 달리 빛이 부딪히고 반사되면서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화면 여기저기 입체감이 끼어들고 정적과 평안, 고요를 발산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오상현 오케이엔피 대표는 “동시대 미술에서의 재현 미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 바라며,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인간 내면의 모습과 그 실존의 깊이도 함께 감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다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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