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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화에 빠진 '반도체 戰士'...."기업 경영과 예술은 도전-열정으로 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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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11-19 11:25:40   폰트크기 변경      
옻칠 회화작가 이태양 범용테크놀러지 대표, 23일 강남 성암아트홀서 열리는 구창모-나가이쇼코 공연에서 특별전시회



나전칠기는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계승돼 1000년을 이어온 독특한 공예예술이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주로 왕들이 사용하는 고급 공예로 고귀함을 이어왔다. 중국은 옻칠로 그림을 그리는 칠예가 발달했고, 일본은 옻칠을 식기나 그릇ㆍ만년필ㆍ자동차 등에 다양하게 적용하면서 산업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생활 문화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인간문화재와 장인에 의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옻칠화 작가 이태양 범용테크놀러지 대표가 경기도 시흥  작업실에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사진=한국미술센터 제공


그러나 최근 항균, 항습, 방수, 방습을 비롯한 옻칠 특유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대중의 관심도 늘어나는 추세다. 전통의 기본을 살리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현대적 디자인으로 진화시키면 독창적인 회화 예술은 물론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상품으로도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K-나전칠기 미술의 이런 우수성을 국제 무대에 알리면서 글로벌 트렌드를 공유하는 작가가 있다. ‘반도체의 세계’에서 ‘감성의 세계’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한 나전칠기 회화작가 이태양 범용테크놀러지 대표가 주인공(55)이다. 그렇게 미술가로 살아온 시간이 50대 중반의 그를 또 한 번 전시장으로 불러냈다.

오는 23일  서울 강남 성암아트홀에서 열리는 ‘구창모 대중가수와 세계적인 실험 음악가(나가이 쇼코)의 만남’ 공연의 특별 초대전 ‘이태양-사유의 미학’ 전이다. 동시에 서울 인사동 희갤러리에서도 다음 달 5일까지 개인전이 열린다. 두 전시에는 한국의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일본의 국보인 고류지(広隆寺) 소장 반가사유상,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바탕으로 ‘사유의 미학’을 최고점으로 몰고 간 옻칠 회화작품 40여 점을 풀어놓는다. 경영인의 삶과 예술적 상상력을 일치시키는 이 작가의 도전 정신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자리다.

지난 10년간 작업실에서 파묻혀 죽어라 전통 미학의 척박한 환경을 빛줄기로 잡아낸 작품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이 가멸차다. 작가는 “반도체 비즈니스의 긴 ‘고독의 터널’을 빠져나와 이제 막 영롱한 ‘빛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며 “수많은 어려운 고비가 찾아왔지만, 인고의 시간을 거쳐 영롱한 빛을 내는 나전칠기의 에너지를 받으며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경주에서 태어난 이 작가는 미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집안 형편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히터와 온도 센서 전문 반도체 기업인으로 살면서 북받치는 감성의 에너지를 달랬지만 미술에 대한 끌림은 갈수록 커졌다. 그 에너지를 넘어서기 위해 빠져든 게 전통 옻칠 회화의 매력이었다. 전통 기법에 뛰어난 임충휴 명장의 어깨너머로 틈틈이 공부하면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이 대표에게 옻칠화는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인 동시에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경영환경에 대한 도전이다.

이태양의 '사유의 미학'                                                                                     사진=한국미술센터 제공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이 작가는 “경영과 미술은 ‘도전과 열정’이라는 코드로 통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기업을 운영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틈나는 대로 옻칠화 작업을 병행해 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 7시 30분까지 전통공예에서 현대적 시각예술을 뽑아낸다.

경기도 시흥 공장에 옻칠공방을 만들어 수업도 진행했다. 옻칠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옻칠화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주로 반가사유상을 활용해 입체 회화로 풀어냈다. 지난 6월에는 도쿄도 미술관에서 열린 미술 단체 삭일회(朔日会) 정기전에 참가해 약 94cm 높이의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47.5cm로 축소한 나전칠기 작품을 선보여 일본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또 지난해에는 프랑스 파리 BDMC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어 유럽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이 대표는 “옻칠화는 전통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기업인이 빈자리를 채워가는 동시에 전통미학을 현대적 화법으로 계승하는 작업으로 이해해달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옻칠화에는 가난한 시절 아픈 편린을 드러내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 태도와 장인정신이 녹아 있다. 작업 공정은 복잡하다. 고운 흙가루를 바른 나무판에 삼베를 붙이고 표면을 매끈하게 사포질한 위에 다시 흙가루를 붙이고 옻칠을 한다. 굳기를 기다려 또 칠하기를 여러 차례, 금박을 올리고 자개를 붙인 다음 다시 칠해야 완성된다. 온화하면서 고요한 분위기를 내뿜는 호연지기의 필법이 마치 풍경화처럼 느껴진다. 절묘한 ‘무기교의 기교’의 감성 세계도 엿보인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바라보는 각도와 빛의 조명에 따라 또 다른 빛깔과 이미지가 연출되는 렌티큘러 기법을 바탕에 깔았다. 렌티큘러 기법은 고대 인도네시아 자바섬 원주민의 그림자 인형극에서 처음 사용됐다. 헝가리 출신 영국 물리학자 데니스 가보르(1900~1970)가 홀로그래피에 적용하면서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그의 옻칠화는 자개 재료의 굴절 현상에서 생겨나는 영롱한 무지갯빛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빛깔의 변화가 존재한다. 재료의 특성상 렌티큘러 기법의 활용이 쉽지 않은 점에서 이를 바탕으로 작업이 이채롭다.

23일 서울 강남 성암아트홀에서 열리는
‘구창모 대중가수(왼쪽)와 세계적인 실험 음악가(나가이 쇼코)의
만남’ 공연 포스터 .                                                 사진=한국미술센터 제공


이 작가는 자신의 옻칠화 작품에 대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 옻칠의 장점과 현대 디자인의 조형미를 융합했다”고 설명했다. 또 “21세기는 통섭과 융합의 시대라고들 하는데 전통이 낡은 틀에 갇히지 않고 미래로 훨훨 날 수 있게 날개를 달아줘야 한다”며 “작가는 항상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전통적인 옻칠공예와 현대적인 시각디자인의 접점을 찾아 나선 까닭이다.

한편, 이 작가는 내년 11월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아 주일 도쿄 한국문화원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민족의 경탄스러운 반가사유상 주조 기술의 우수성을 통해 한일 문화교류의 실체를 알리겠다는 이 대표의 각오가 매섭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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