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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수운 최제우 묘소 앞 한국 최초의 근대 인물기념석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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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11-25 11:04:13   폰트크기 변경      

지난달 28일은 동학(東學)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1824~1864년)선생이 탄신한 지 200주년 되는 뜻깊은 날이었다. 전국에서 천도교를 비롯한 동학 관련 단체가 참여하여 신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를 통해 인간 존엄성을 알린 수운 선생의 위대한 사상에 관한 학술회의와 예술 행사가 펼쳐졌다. 필자 역시 동학 가문의 후예로서 수운 선생 묘소 앞 기념 인물 석상 건립 당시의 사진 자료를 발굴하여 공개하는 바이다.

수운 선생은 1864년 3월 10일 조선 조정으로부터 새로운 시대의 평등한 사상을 전파한 동학의 우두머리로 몰려 대구장대에서 순교하였다. 시신은 해월 최시형을 비롯한 제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지금의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야산 풀숲에 가매장되었다가 1907년 10월 17일 천도교에서 분파되어 나온 시천교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묘소도 단장되었다. 이때 묘소를 이장한 인물들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해월의 제자인 김연국, 이용구, 박형채, 김낙철, 김사영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세부적인 일은 박형채가 담당하였다. 박형채는 동학혁명의 보은취회((報恩聚會) 당시부터 친분이 있던 해월의 종제(從弟) 최형오(필자의 조부)와 묘소 이장을 주관하였다. 최형오는 해월 생존시 경주 집안의 대소사와 가매장된 수운의 묘소를 도맡아보는 등 초기 동학 교단에 비중이 높은 인물이었다. 1916년 그의 회갑날에는 천도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최준모, 해월의 차남 최동호, 시천교 대례사(大禮師) 김연국, 박형채, 김낙철 등이 축시와 폐백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 인물기념석상

시천교에서는 1911년 5월 15일 수운의 묘소 앞에 인물기념석상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박형채는 서울에서 뛰어난 솜씨를 가진 석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수운의 실제 생존 모습을 구현한 인물상을 제작하였다. 인물 석상의 높이는 185cm(기단석 포함)이며, 석재는 화강석이다. 인물 석상의 관모는 수운이 스스로 고안한 잎사귀 모양의 법관(法冠)을 조각하였고, 오른손에는 동학의 21자 주문의 단주와 왼손에는 동학경전인 동경대전을 쥐어 새로운 사상을 세상에 알린 혁명가로서의 상징적인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얼굴 부분은 동학 교조로서의 위엄을 리얼리티로 구현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수운의 이 석상을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 인물기념상으로 학계에 발표하였다.(월간 미술세계 8월호, 2003)

인물기념석상의 중앙에 드리워진 법의(法衣)에 당시 서화가이면서 외교사절로 활약한 청운 강진희(1851~1919)가 전서체로 쓴 ‘시천교조제세주묘(侍天敎祖濟世主墓)’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인물상 뒷면에는 ‘강생팔십팔년오월일립 강진희전야(降生八十八年五月日立 姜璡熙篆也)’ 즉, 수운 탄생 88년 5월(1911년 5월)에 강진희가 전서로 쓰고 세웠다는 내용이다.


수운의 인물기념상 건립의 연유를 밝혀주는 문헌사료가 바로 1915년 시천교에서 간행한 ‘시천교조유적도지(侍天敎祖遺蹟圖誌)’이다.

1915년 시천교에서 간행된 ‘시천교조유적도지’에 수록된 수운 최제우 인물기념석상 목판화 삽도. /사진: 필자 제공

이 사료에 의하면 수운의 이장된 묘소와 그 앞에 세워진 인물기념석상을 아주 사실적 원근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그림은 당대 최고의 화가 심전 안중식(1861~1919)의 만년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에 최초 발굴된 수운 묘소 기념석상 사진은 ‘시천교조유적도지’에 수록된 ‘성묘양의도(聖墓襄儀圖)’와 그 구도가 일치하고 있다. 당시 그림을 제작한 심전이 이 사진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해강 김규진에 의해 촬영된 수운 인물기념석상 사진


조부로부터 자세한 사항을 전해 들은 필자의 선친인 석당 최남주의 증언에 의하면, 시천교 주요 간부인 박형채에 의해 주도된 한국 근대 인물사의 기념비적인 이 석상은 서울 시천교 교당에서 제작되어 열차를 통해 경주로 운송되었다고 한다. 이후 경주 성건동의 조부 집에 며칠 동안 모셔졌다가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 자락에 이장된 수운의 묘소 아래까지 운반되었다. 이장된 묘소가 가파른 관계로 인근 가정리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6명의 인부들이 목도를 하여 운반해서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증언을 한 석당은 어릴 때부터 조부의 손을 잡고 천도교 경주 대교구에 입교하였다. 이어 서울 보성고보 재학시 집안 형님인 정순철(해월의 외손자, 동요작곡가)의 인도로 천도교 소년회에 입회하였고, 소파 방정환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5년 7월 정순철과 방정환이 울산 천도교 소년회를 방문하였을 때 상봉하였고, 그들과 함께 경주 용담정을 참배하였다.


석당은 경주 출신의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로서 동학과 관련된 여러 사료들과 유적지들을 발굴하고 답사하였다. 특히 현재 경주시 서면 도리에 있는 수운의 조부 최종하와 부친 근암 최옥의 묘소를 답사하였다.

1934년 4월 8일 수운 최제우 묘소를 참배하고 기념 촬영한 천도교 간부들(오른쪽 맨 끝 양복 차림의 석당 최남주) /사진: 필자 제공

이어 근암의 문집을 발굴하고 서울대학교 김상기 교수에게 이를 제공하여 근암의 학문 세계를 학술적으로 조명할 수 있게 도왔다. 또한 조부가 필사한 해월의 집안 족보를 동학 사료 연구가 표영삼에게 제공하였고, 해월의 청년 시절 거주지인 포항시 신광면 검등곡을 답사하였다. 석당의 동학 정신 계승에서 가장 큰 업적은 1972년 자신이 발표한 ‘구미산 일대 유적고찰’이란 논문이 기초가 되어 동학의 발상지인 구미산 용담정 일대가 국립공원에 편입되었고, 성역화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필자는 선친의 동학 관련 자료집을 정리하다가 뜻밖의 오래된 사진들을 발견하였다. 그중에서도 수운의 묘소 앞에 세워진 인물석상의 낡은 사진에 눈길이 갔다.

최초 발굴된 ‘수운 최제우 묘소 인물기념석상’ 건립 당시 사진(1911년 5월) /사진: 필자 제공

가로 15cm, 세로 11cm의 이 흑백사진은 오른쪽 하단 부분이 약간 훼손되어 있다. 사진 내용으로 볼 때 이장된 수운의 묘소가 정갈하게 단장되어 있으며, 묘소 뒤쪽에 소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또한 묘소 정중앙에 카메라 렌즈를 클로즈업시켜 석상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사진 뒷면에는 ‘신해춘’(辛亥春)이라고 희미한 붓글씨가 적혀있고, 그 이후 누군가에 의해 ‘동학의 귀한 사료’라고 펜글씨로 적혀있다. 여기서 ‘신해춘’이란 뜻은 수운 인물기념석상이 건립된 1911년 5월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사진이 석당 가문에 소장된 경위를 살펴보면 당시 시천교 간부 박형채가 석상 건립에 도움을 준 해월의 사촌 동생인 조부에게 기념으로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 이 사진은 누구에 의해 촬영되었을까? 당시 시천교는 동학의 성지인 경주 구미산과 용담정 일대를 모두 매입하였다. 동학의 창도주 수운의 묘소를 이장, 단장하고 인물기념석상까지 서울에서 제작하여 원거리인 경주까지 운송하여 건립하였다. 특히 뛰어난 석상조각가와 당대 최고의 서화가 청운 강진희의 전서 글씨를 조각하는 데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을 것이다. 당시 청운과 가까운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와 최초로 천연당(天然堂)이란 사진관을 서울 소공동에 개업하여 성업 중이었다. 해강의 아들인 청강 김영기(한국화가)는 6ㆍ25 한국전쟁 중 경주에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이때 청강은 석당과의 대화 중 자신의 부친이 1910년 초부터 신라고도 경주에 여러 번 방문하여 대나무 그림과 서예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하였다. 정황 상 이때 청운의 소개로 수운 묘소 앞 근대 인물기념석상 사진을 해강이 직접 출장하여 촬영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사진은 ‘시천교조유적도지’에 수록된 ‘성묘양의도(聖墓襄儀圖)’와 그 구도가 일치하고 있다. 당시 그림을 제작한 심전이 이 사진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새벽 일찍 천도교 의식인 청수를 모시고 21자 천도교 주문단주를 굴리는 만년의 석당 최남주. /사진: 필자 제공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을 맞아 최초 발굴된 수운 묘소 인물기념석상 사진은 우리나라 사진 역사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다. 필자는 1989년 고(故)박태근 박사와 함께 서울대 규장각에서 19세기 청나라 연행사로 다녀온 이의익(李宜翼 1794~1883)의 ‘연행초록’을 발굴하여 한국인의 사진 첫 대면은 1863년(음력1월29일) 북경의 아라사관(러시아공사관)이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일간스포츠 1989년8월13일자)


이번 수운 묘소의 한국 근대 인물기념석상 건립 당시의 사진 발굴을 통해 동학 창도주 수운 선생의 연구가 다양한 방면에서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현암 최정간(동학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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