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새해 첫 출근길이다. 힘차게 내디뎌야 할 발걸음이 무겁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하며 나누는 첫 인사는 왠지 모르게 공허하다. 한 해 동안 이루고 싶은 포부를 희망차게 설계하는 것조차 부질없어 보인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이 국민 하나하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나라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계엄ㆍ탄핵정국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이 여파로 추락한 경제는 바닥을 예상하기 힘들다.
정치권은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에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을 이어받은 최상목 부총리는 지난달 31일 국회가 추천한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 가운데 여야가 각각 추천한 2명을 임명했다. 하지만 여야 모두 반발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야당의 탄핵 협박에 굴복했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민주당은 “삼권분립을 무시하는 위헌적 발상”이라며 비판했다. 최 권한대행은 “정치적 불확실성과 사회 갈등을 종식시켜 경제와 민생 위기 가능성 차단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에 헌법재판관을 임명했다”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정쟁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경제는 이미 만신창이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1470원을 넘어 1500원대를 향하고 있다. 주식은 외국인 투자자의 이탈로 급락했다. 계엄사태가 벌어진 지난해 12월3일 2500.10이었던 코스피지수는 2400선이 무너진 2399.40으로 폐장했다. 내수경기의 척도인 1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84.6으로 전월 대비 12.7포인트나 떨어졌다. 5년 만에 최대 낙폭이다. 최근 몇 년간 우리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수출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이달 취임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부과 시나리오는 대미수출에 치명타다. 산업연구원은 우리 대미수출이 최대 13.1%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정치와 경제가 이 상황인데 개별산업이 온전할 리 없다. 건설업을 보면 올 한해 걱정이 태산이다. 지난해 11월경 일찌감치 나온 연구기관들의 올해 건설경기 전망은 부정적이었다. 건설산업연구원은 올해 건설투자를 전년보다 2.1%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고 건설정책연구원은 1.2%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 계엄ㆍ탄핵정국이 더해졌으니 올해 건설투자는 당초 전망치보다 더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중앙회의 1월 경기전망조사를 보면 건설업은 전월보다 5.4포인트 하락한 64.2를 기록했다. 지난해 1월과 비교하면 9포인트나 떨어진 수치다.
경제가 망가지면 3류국가로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최고의 국격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섰고 K-팝을 비롯한 K-문화에 세계가 열광하는 시대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70여년간 쌓은 결과다. 현세대는 이 영화를 물거품으로 만들어선 안된다. 후세대가 이어갈 수 있도록 기반을 탄탄히 다져도 모자랄 판이다.
정치권은 정국이 안정을 되찾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최 권한대행의 주문처럼 나머지 1명의 헌법재판관이 임명될 수 있도록 여야 합의를 서둘러야 한다. 그래야 탄핵의 조속한 법적 판단을 기대할 수 있고 지금의 불확실성을 걷어낼 수 있다. 국회ㆍ정부협의체를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삼아 정국수습책도 마련해야 한다. 정파적인 이해를 따지지 말고 각계의 고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책 당국은 판단의 최우선을 경제에 두고 결정을 서둘러야 한다. 환율과 주식시장 안정화에 가능한 정책을 동원해야 한다. 내수회복과 수출을 늘리기 위한 조치도 과감히 시행해야 한다.
우리는 을사년에 대한 안좋은 기억이 있다. 역사로 배운 기억이다. 대한제국은 을사년인 1905년 일본과 강제조약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으로 칭해지는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다.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배에 들어간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해가 을사년이다. 지난해 12월 촉발된 계엄ㆍ탄핵정국은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렸다. 이 위기를 넘어서지 못하면 2025 을사년도 역사에 안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역사에 부끄러운 한 해가 돼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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