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윤석열 대통령 체포영장 2차 집행 시도를 앞둔 가운데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쪽문에 철조망이 설치돼있다. /연합뉴스 |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 한국의 보수는 또다시 붕괴 위기에 몰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대처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일련의 행태는 중도보수 지지층에는 당혹감과 실망감, 열패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거야(巨野)가 탄핵 남발 등으로 국정운영을 방해한다고 군 병력을 동원해 야당을 제압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는 헛웃음이 나온다. 권투 시합에서 실력이 달려 연타를 두들겨 맞았다고 링 밖에 있는 흉기를 집어들고 휘두른 것과 다를 바 없다. 돌아온 것은 반칙패이며, 탄핵 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경기 룰을 제대로 숙지 못하고 있는 데다 자제력도 부족한 데서 온 자승자박이다. 민주주의 룰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정치지도자로서 자질도 미숙하다는 평가가 불가피하다.
같은 해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윤 대통령이 공조수사본부(공조본) 수사에 불응하고 경호처를 동원해 체포영장에 저항하는 모습은 실망감을 넘어 참담함을 느끼게 한다. 공수처 수사와 영장 집행에 대해 법원이 누차 정당성을 인정했음에도 무작정 불법이라고 버팀으로써 본인이 검사 시절 금과옥조로 내세웠을 법질서 자체를 무너뜨리고, 공권력 간 무력충돌 가능성을 조장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보수의 가치와 윤 대통령 정체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윤 대통령이 보수정당의 후보로 대선에서 승리해 보수정권을 출범시켰지만, 엄밀히 따져 보수 진영의 적통 후계자가 없어 방계에서 데려온 ‘강화도령’이란 당시 지적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검찰 재직 시절 수차례 좌천성 인사를 당한 비주류였기 때문에 검찰개혁을 별렀던 문재인 대통령이 발탁했지만, 막판에 정권 실세들로부터 핍박받는 이미지가 굳어져 좌파 진영의 대항마로 보수 유권층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권 출범 2년 반이 지난 지금, 체포영장에 온갖 법리와 수단을 동원해 맞대응하는 것을 보면, 그의 정체성은 ‘검찰주의자’에서 그친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지위와 권력에 걸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함으로써 사회 불만과 갈등을 줄이고 안정을 도모하려는 보수의 가치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본인이 아무리 선의를 갖고 계엄을 발동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정치 불안이 심화하고 경제 불확실성이 커져 성장전망치가 하향조정되고 대외신인도가 위협받는 등 역대급 국가 위기가 초래된 데 대해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하지 않는가. 본인이 평생 떠받들던 법 체계에도 행위자의 고의나 과실 여부와 상관없이 특정 행위로 인해 발생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결과 책임(strict liability)의 원칙’이 있지 않나. 지난해 12월 7일 대국민담화에서 “계엄 선포와 관련해 법적, 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음에도 그 약속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차기 대선보다 먼저 내려질 수 있도록 헌법재판 탄핵 절차를 지연시켜야할 전략적 필요성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탄핵 심판 자체를 방해한다거나 탄핵안 기각을 이끌어내기 위해 억지 논리로 대국민 여론전을 펼치고 헌법재판소를 압박하는 행위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소기의 목적 달성도 어려울 뿐더러 보수 재기의 밑천으로 삼아야할 남은 신뢰마저 날려버리는 우행(愚行)이기 때문이다.
진보는 전통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개혁 성향에서 보수보다 우위에 있다. 진보는 약자와 소수자의 권익을 존중하고 보호하려 한다는 점에서 사회 정의에서도 우위에 있다. 진보는 대기업 및 부자 중과세(重課稅)로 부의 재분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 수혜자도 될 수 있다.
반면에 보수 가치의 창고는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정치학자 출신에 방송 패널로 인지도를 높여 여당 비례대표로 원내 진출한 국민의힘 최고위원이란 의원이 ‘백골단’은 상대 측 프레임이라 치더라도 '반공'을 내세워 윤 대통령 체포 저지를 옹호하려 했던 모습은 보수 철학의 빈곤을 보여주는 상징적 단면이다.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고 있는 세력이 공산주의와 연결돼 있다는 주장을 은연중 펴고 싶었던가. 보수 가치를 지탱하기 위한 덕목에 아직도 ‘반공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다면 놀랍고 개탄스러울 뿐이다.
진보가 나무를 보고 국정을 흔들 때 보수는 숲을 보고 사회 안정을 도모하는 노력으로 국민 지지를 호소해야 한다. 진보가 소수의 권익에 매몰돼 국익을 위태롭게 할 때 보수는 최대 다수의 권익을 우선시하며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진보는 균형발전과 평준화로 경쟁과 우열 격차를 불온시할 때 보수는 대외경쟁력과 수월성 추구로 차별화해야 한다. 그에 따른 정책과 결정이 선의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결과를 초래했을 때는 스스로 책임지는 것도 보수의 참된 모습이다. 탈원전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원전 확대 정책의 발목을 잡는 좌파 진영과는 달라야한다.
빈사(瀕死) 상태에 빠진 보수가 재기에 필요한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윤 대통령 책임을 부정해선 곤란하다. 당 지도부가 탄핵 지연전술의 선을 넘어 탄핵심판을 저지하는 듯한 언행을 보이는 것은 우려스럽다. 백보 양보하더라도, 뜬금없는 비상계엄으로 평지풍파를 일으켜 경제안보 위기뿐 아니라 보수진영에도 치명타를 입힌 데 대한 책임은 물어야하지 않나. 그것이 헌재의 심판 결정이라면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윤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보수 재기를 위해 한 줌의 거름이라도 보태려 한다면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공조본 수사와 헌재 심판에 임해야 한다. 국익을 위해 장렬하게 산화(散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을 털어내고, 국민신뢰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참된 보수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끝까지 체포에 저항하다가 물리력에 제압당하는 모습으로 ‘한남동 공성전’의 대미를 장식한다면 역사에는 친위 쿠데타로 자충수를 던진 망상장애 권력자의 비루한 최후라고 기록될지도 모른다.
권혁식 논설위원 kw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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