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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판화 40년의 집념과 열정...“수묵화의 신 새벽을 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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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07-09 14:52:15   폰트크기 변경      
강승희 추계예술대 교수, 내년 정년 앞두고 16~30일 노화랑서 개인전


‘동판의 연금술사’라고 불리는 강승희 추계예술대 교수(64). 그가 새로운 미술 인생을 경작하려고 서울에 닿은 것은 1980년 2월이었다.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에 입학한 그는 20년의 제주 생활을 정리하고 부랴부랴 서울 홍대 인근에 똬리를 틀었다.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순식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살던 집을 옮기는 ‘이주’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밴 낡은 문화를 완전히 내려놔야 하는 ‘이민’이었다.

섬에 대한 환상을 잠시 접어두고 그림 공부에 매진했다. 1984년 서양화과에 개설된 판화 수업을 받으며 먹이 번지는 수묵 효과를 살려내는 동판화에 눈이 번쩍 띄었다. 온고지신이란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서양의 미술기법으로 가장 한국적인 미학을 녹여내려 굳게 마음먹었다. 매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국의 강인한 산세와 주변의 사물에 주목했다. 칼바람이 부는 여명, 빛이 떨어져 아른거리는 바다, 돌담 밑에 우뚝 선 소나무, 담벼락에 활짝 핀 개나리 등 황홀한 이미지를 동판에 옮겼다. 때때로 바람 소리와 역동성을 쫓으며 마음 속에 갈망하는 것 그대로를 화면에 녹여냈다. 어딘가 신비로우면서도 향수를 자극하는 그의 동판화는 한·중·일 미술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명성을 안겨다 줬다. 미술시장의 반응도 뜨거웠다. 젊은 시절   곧추 세운 집념과 열정이 한치의 꺾임도 없이 벌써 40년의 길목을 지나고 있다.

강승희 추계예술대 교수가  9일  노화랑의 개인전을 앞두고 김포 작업실에서 작품 제작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경갑 기자


수묵화의 발묵 효과를 동판화 기법으로 되살려낸 강승희 교수가 지난 40년간 작업한 작품들을 서울 한복판에서 펼쳐 보인다. 오는 16~30일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새벽, 여백을 열다’을 주제로 열리는 개인전을 통해서다.

내년 2월 정년을 앞두고 동판화에 꿋꿋하게 매달려온 40년을 결산하는 자리다. 흑백 톤의 소나무와 들꽃. 잔잔한 명암의 변주가 돋보이는 이미지 등 사물의 민낯을 붙잡은 작품 30여 점을 건다.

 9일 경기도 김포 작업실에서 만난 강 교수는 “지난 40여 년 동안 미술 인생을 걸어오며 보고 느낀 것들을 전하는 자리”라며 “판화와 수묵화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나름의 성과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강 교수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시각적인 조형 언어로 번역해 전파하는 ‘무언(無言)의 환쟁이’로 불린다. 1980~1990년대 민주화 시대에 대한 미술적 모색을 주도하며 화화적 판화를 차지게 화면에 품었다. 한국 현대판화의 맥을 잇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외국 유학 후 국내에 들어와 작업 활동을 한 데 비해, 그는 40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며 경력을 쌓았다. 2020년대 들어선 섬세한 에칭기법을 응용한 유화에도 도전하며 미학적 프리즘을 넓혀갔다.

강승희의 '새벽'                                                                       사진= 노화랑 제공
                    


전시장에 걸릴 그의 판화들은 최소의 선과, 색. 운율로 쓴 한 편의 시(詩) 같은 그림이다. 우리에게 잃어가는 전통 수묵화의 서정성을 이끌며, 내면의 낮고 깊은 대화에 귀 기울이게 한다.

강 교수가 동판화를 고집한 이유가 궁금했다. “고요한 수묵이나 담채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한국화의 맛을 현대적 감성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술가란 과거(전통)를 기억하고 현재를 고민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요. 사실 저희 세대는 서양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전통의 고수와 현대적 변화의 모색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게 되었죠. 서구사실주의 회화와 소묘 방법을 익히면서 동시에 전통 수묵화에 대한 이해와 안목도 동시에 겸비할 수 있는 저만의 방법을 찾아나선 겁니다.”
 강 교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전통회화와 서양판화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수묵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지나친 서구 추종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한 제고를 요구하고 있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전통과 현대의 조화, 그리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독창성, 이것이 제 그림이 갖는 미덕입니다.”

실제로 그의 판화는 웅장한 기상과 음악적인 리듬감, 단순한 구도와 강렬한 필선이 특징이다. 관조적인 수묵산수화가 아니라 생생한 현장감을 담은 생활 속의 산수화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승희의 '새벽'                                                                       사진=노화랑 제공


그의 판화가 특별하고,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역발상에 있다.  전통적인 동판화 작품이 화면 전체의 배경색이 검정색인 것에 반하여 작가는 그것을 단색화처럼 밝고 부드러운 회색 톤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화면 안에서 보여지는 여백을 시각언어로 전이 시킨 점이다.

작품은 극도의 정밀함과 간단치 않은 작업과정을 요구하는 장인정신으로 완성된다. 동판화 기법이 지닌 특유의 부드럽고 섬세한 디테일이 집약돼 내밀한 환상감이 전해진다. 삶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소소한 사물과 풍경의 은밀한 대화, 혹은 무심코 놓아 두었던 기억과 현재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미술평론가 김윤섭씨는 “동판화의 위대한 실험자”라고 평했다. “시적인 구도 안에서 사물을 관조한다”고도 했다.

미술평론가 고정환 씨 역시 “1990년대 전통적인 수묵화를 문학적 감각으로 소화해 크게 주목받았던 그의 화력과 남다른 관찰력이 유감없이 발휘한 작가”라고 격찬했다.

작품 제작에도 무수한 땀방울이 녹아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붓이나 바늘 같은 도구를 직접 제작해 사용한다. 바늘을 찍어 무수한 점을 만드는 방법으로 음영과 원근을 표현하고, 질감을 시현 한다. 그렇게 형상화된 산세나 사물의 표현이 이른바 미점산수를 떠올리게 한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무려 150회에 달하는 에칭을 반복적으로 진행하며 3개월 넘는 과정을 거친다. 총총하고 섬세한 레이어가 화면에 음영을 만들어 내면서 작가가 일관되게 천착해온 새벽의 빛깔이 탄생한다. 어쩌면 새벽의 하늘빛 같고, 물빛 같은 파르스름한 색깔의 기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때 그림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이제는 그림이 사회 속에 녹아 들어가 현대인의 얼룩진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는 너무 치열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조금 다급해 보입니다. 이제는 어둠이 걷히면서 빛이 새어 나오는 먼 동쪽의 새벽 하늘을 보며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야 합니다.”

전통 수묵채색화를 근대적인 양식으로 재창조한 강 교수의 ‘새벽’ 시리즈들이 작업실을 아우르며 묘한 기운을 뿜어낸다.

노세환 노화랑 대표는 “단순한 구성과 판화 기법을 활용한 문인 취향의 특성으로 한국화의 명맥과 가치를 드높인 그의 작품을 통해 수묵화의 양식과 그 속에 담긴 현대인의 시대정신을 살펴보기 위한 자리”라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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