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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죽을 것 같아도 틀 수 없다”…에어컨 눈치보는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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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07-09 17:54:05   폰트크기 변경      
집주인 요구에 땀 흘리는 쪽방 노인들

단독세대형 에어컨 설치 지원 못 받아

폭염에 실버극장 몰려들어

“하루 평균 5~600명 관람객” 



폭염경보가 내린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공용에어컨이 꺼져 있는 모습. / 사진 : 박호수 기자


[대한경제=박호수 기자] 지난 8일 서울의 낮 기온이 37.8도까지 치솟았다. 기상 관측 이래 7월 상순 기준 최고치로, 체감온도는 40도에 육박했다. 도시 곳곳이 ‘재난 수준의 열기’에 잠식된 그날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을 찾았다.

골목길에는 쿨링포그가 작동 중이었다. 땀에 젖은 상의를 걷어붙이고, 전동휠체어를 탄 채 물안개 아래 벽에 기댄 김모 씨(89). 그는 “방에 있으면 너무 더워서 숨을 못 쉬어. 그래도 낮에는 에어컨을 잘 못 틀어. 집주인이 전기세 많이 나간다고 뭐라 하면서 꺼버려”라고 토로했다. 

서울시는 쪽방촌 복도식 건물에 공용 에어컨을 설치하고, 여름철엔 전기요금을 3개월간 최대 30만원까지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선 김 씨의 주장처럼 꺼져 있는 에어컨이 더러 보였다. 시 관계자는 “지원금이 나온다고 해도, 공용 에어컨의 전기요금을 집주인이 부담해야 하는 구조라 마음껏 틀 수 없다는 인식이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단독가구로 분류돼 에어컨 지원을 받지 못한 한 돈의동 쪽방촌 방의 내부 모습. / 사진 : 박호수 기자


심지어 ‘단독세대형’으로 분류된 방은 에어컨 설치 지원 대상도 아니다. 이날 한 어르신은 기자를 불러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문을 여는 순간 공기보다 먼저 피부를 때린 것은 푹푹 찌는 열기였다. 1평 남짓한 방 안은 머리 하나 뉘일 공간조차 벅찼고, 벽과 천장은 축축히 젖은 듯 눅눅했다. 


그는 “설치비를 알아보니까 58만원이래. 너무 비싸서 센터에 말했더니 ‘단독세대는 해당 안 된다’고  했다”라며 “나도 똑같은 쪽방 사는데 왜 차별받냐”라고 토로했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쪽방촌 인근 여성 전용 무더위 쉼터에 이용객이 한명도 없는 모습. / 사진 : 박호수 기자 


인근에 설치된 무더위 쉼터도 실효성이 떨어진다. 기자가 직접 찾은 돈의동 여성 전용 무더위쉼터에는 단 한 명의 이용객도 없었다. 방문록을 보니 이 쉼터는 하루 평균 3∼4명만 이용하고 있었다. 지난 4일과 6일에는 1명만 머물렀다.


인근 쪽방촌 지원실 직원은 “동네 사람들이랑 마주치면 싸움이 나거나 불편하다며 꺼리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인근 ‘온기창고’가 실질적인 피서지 역할을 한다. 시원한 음료와 쿨타월 등을 무료로 제공하는 이곳은 민간 후원으로 운영된다. 한 직원은 “기업들로부터 후원받은 걸로 채우는데 부족할 때도 많다. 이런 데가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8일 탑골공원 정자에서 노인들이 더위를 피해 쉬고 있는 모습. / 사진 : 박호수 기자 


같은 시간 돈의동에서 불과 1㎞ 남짓 떨어진 종로 탑골공원에는 수십 명의 어르신이 담벼락 그늘 아래 자리를 틀고 있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장윤정의 ‘어머나’에 맞춰 손뼉을 쳤다. 노래를 부르는 노인들의 얼굴엔 고단한 중에도 묘한 활기가 서려 있었다.

노원구에서 왔다는 이모 씨(91)는 “에어컨 나와도 노인정엔 안 가. 거긴 화투 치는 할머니들밖에 없거든. 여기선 친구들도 있고, 얘기도 하고”라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씨는 매일 오전 지하철 1호선을 타고 탑골공원에 들른 뒤 점심 무렵 무료급식소에서 식사를 한다. 이후에는 어르신들과 함께 낙원상가 4층의 실버영화관 ‘낭만극장’으로 향한다. 그는 “에어컨도 나오고, 영화도 보고, 시원하니까 좋지. 하루가 금방 가”라고 말했다.

매표소 직원에 따르면 이곳에는 하루 500∼600명의 노인 관객이 드나든다. “요즘처럼 더운 날엔 빈자리가 더 빨리 찬다”고 직원은 설명했다. 이날 상영작은 1998년작 ‘율리시즈’. 상영관 안은 어두웠고, 관객들은 상영이 시작된 뒤에도 천천히 입장했다. 영화값은 2000원. 노년의 ‘하루’를 지탱하는 금액이다.



1998년작 ‘율리시즈’을 상영하고 있는 실버영화관. / 사진 : 박호수 기자


9일 서울시는 긴급 폭염대책 상황 점검 회의를 열고 폭염 취약계층 보호 방안을 재점검했다. 현재 쪽방촌에는 무더위쉼터 7곳, 밤더위 대피소 6곳을 9월까지 개방 중이다. 복도 공용 에어컨 전기료, 선풍기ㆍ쿨매트 등 냉방용품, 냉장 아리수 제공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선 제도와 체감 사이의 간극이 선명하다. 여름은 모두에게 오지만, 모두에게 같지는 않다. 91세 노인 이씨는 영화관의 냉기에 기대 여름을 견딘다. 89세 김씨는 에어컨조차 없이 숨 막히는 방에서 하루를 버틴다. 한 사람은 “2000원으로 하루가 간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58만원이 없어 죽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박호수 기자 lake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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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수 기자
lake806@d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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