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 민원 14만4000여 건
에어컨 설치비 600억…“예산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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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속 지하철역 내부 모습. / 사진 : 연합뉴스 |
[대한경제=박호수 기자] “이게 실내냐, 사우나지.”
10일 오후 2시 서울역 지하 4호선 승강장. 울긋불긋한 얼굴로 연신 부채질을 하는 시민들 틈에서 한 중년 남성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짙은 회색 셔츠는 등에 땀이 배어 일부가 먹색으로 바뀌었고, 급히 달려온 듯 땀을 흘리는 한 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손선풍기를 목에 대고 있었다. 열차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침묵이 흘렀다. 움직이면 더 더워지기 때문이다.
10일 김지향 서울시의회 의원(국민의힘, 영등포4)이 서울교통공사로부터 받은 ‘지하철 냉방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서울지하철 276개 역사 중 51곳(18.5%)이 냉방시설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 중 26곳은 지하역사로, 냉방 보조기기마저 없어 폭염에 방치된 상태다.
비냉방 역사에는 2호선 아현, 충정로, 한양대 등 17곳, 3호선 구파발, 녹번, 홍제 등 20곳, 4호선 한성대입구, 서울역 등 9곳이 포함된다.
서울교통공사는 8∼9월 지상역사 15곳에 냉방보조기기 60대를 한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지만, 7월에는 예산 부족으로 이를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지하 찜통’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공사 관계자는 “지하 비냉방 역사에 에어컨을 설치하려면 전면적인 구조 리모델링이 필요하다”며 “역사당 500억∼600억원이 들어 시 예산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공사에 따르면 시에 지난해 예산 편성을 요청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냉방이 안 되는 지상역 25곳도 문제다. 성수역, 강변역, 잠실나루역 등은 구조상 에어컨 설치가 어렵다. 공사 측은 “지상역사는 실질적으로 에어컨 설치가 어려워 냉방 부스를 두는 수밖에 없다”며 “에어컨이 설치된 역사들 중에서도 시설이 노후해서 온도가 높은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기록적인 폭염 속에 민원도 폭증하고 있다. 냉방 관련 민원은 2022년 18만 건에서 지난해 30만 건 가까이로 늘었고, 올여름(6월1일∼7월 8일)에는 이미 14만4000여 건이 접수됐다.
장애인과 어르신, 임산부 등 이동약자들의 비상상황을 대비해 역사 내에도 무더위 쉼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평소 부평에서 1호선으로 출퇴근하는 박은지 씨(35)는 “인천(지하철)에는 어르신들이 앉아서 더위를 식힐 수 있는 무더위 쉼터가 있던데, 서울은 보이지 않는다”며 “종각역이나 종로3가역에는 어르신들이 온열질환으로 쓰러지기 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재 인천시는 도시철도 1ㆍ2호선 31개 역사에 대형선풍기와 생수, 부채 등을 비치한 무더위 쉼터를 운영 중이다. 시민들은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역 안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다.
서울도 과거엔 ‘무더위쉼터’를 운영한 바 있다. 지난 2023년에 공사는 266개 역사에 무더위쉼터를 마련했지만, 서울시가 실효성이 낮다고 판단해 올해부터는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현재는 역사 내 역무실이나 고객대기실 등에서 비공식적으로 물을 제공하거나 잠시 쉴 수 있는 수준이다. 게다가 이러한 정보는 현장 안내가 부족해 대부분 시민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지난 9일 냉방시설이 없는 3호선 경복궁역을 찾은 최호정 서울시의회 의장은 “앞서 행정사무감사 때도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라고 수차례 지적했지만 하나도 개선된 것이 없다”며 “117년 만에 가장 더운 7월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냉방보조기기 설치를 최대한 당겨 늦어도 7월 중 가동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달라”고 말했다.
박호수 기자 lake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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