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대한경제 |
[대한경제=심화영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무죄 확정은 삼성그룹에 단순히 사법 리스크 해결을 넘어, 근본적인 경영 패러다임 전환을 몰고 올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10년 가까이 이어진 ‘사법 족쇄’를 벗어나면서, 삼성은 ‘투자 확대’와 ‘지배구조 재편’이라는 두 축을 동시에 본격 가동할 수 있게 됐다.
가장 주목되는 변화는 2017년 하만(9조3000억원) 인수 이후 사실상 멈췄던 대규모 인수합병(M&A)의 재개다. 올해 들어 삼성은 미국 마시모의 오디오사업부(약 5000억원), 유럽 최대 공조기기 업체 플랙트(약 2조4000억원),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젤스 등을 연달아 인수하며 신성장 분야에서의 입지를 넓혀 왔다.
삼성의 M&A 전략은 단기 실적보다는 장기 성장성과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기존 반도체·스마트폰·가전 등 주력 사업을 중심으로 하되 AI, 로봇, 바이오, 헬스케어 등 고성장 분야로 사업 영역을 적극 확장하는 모습이다.
특히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인적분할을 통한 ‘삼성바이오에피스홀딩스’ 신설은 계열사별 중간지주 체제 전환 가능성을 시사하며, 책임경영 강화와 지배구조 투명성 확보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이 회장의 경영 활동에 제약이 생긴 이후 과감한 의사결정이 지연되며,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그룹 실적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반도체 사업은 초격차 전략이 흔들리며 위기를 겪고 있다.
메모리 부문에서는 인공지능(AI) 핵심 부품으로 부상한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이 지연되면서, 글로벌 D램 시장 1위 자리를 SK하이닉스에 내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인 파운드리·설계 부문도 조 단위 적자를 이어가며, 대만 TSMC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 회장이 강조하는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라는 원칙에 따라, 삼성은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성능 개선과 6세대 HBM4 양산 기술 확보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의 고위급 협력 논의 가능성도 거론된다.
또한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2나노 공정 개발과 평택 P4·P5 라인 투자에 속도를 내는 동시에, 설계 툴 역량 강화를 위한 M&A도 검토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삼성의 반도체 기술력 강화를 위해 설계 부문 M&A가 핵심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전문가들은 삼성의 ‘뉴삼성’ 전략이 성공하려면 속도와 함께 지배구조의 투명성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동안 ‘이재용 회장 → 삼성물산 → 삼성생명 →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삼성의 간접 지배 구조는 시장과 정치권의 지속적인 개선 요구를 받아 왔다.
이른바 ‘삼성생명법’(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삼성생명은 보유 중인 삼성전자 지분을 대거 매각해야 하며, 이에 따라 삼성물산 중심의 지배력 재편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 삼성 내부에서는 지주회사 전환, 투자·사업부문 분리, 계열사 분할 및 상장 등 다양한 구조 개편 시나리오가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삼성은 금융 계열사를 보유한 산업자본이 주요 제조업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로, 금산분리 원칙과의 충돌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 입장에선 금산분리 강화가 법제화되면 지배구조 전환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될 것”이라며 “정책 환경과 시장 압박에 따라 선제적인 대응 전략을 준비 중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편 이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 여부도 관심사다. 현재 국내 4대 그룹 총수 중 유일하게 미등기임원인 이 회장은 지난 3월 임원 세미나에서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 문제에 직면했다”며 강도 높은 내부 혁신을 예고한 바 있다.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등기임원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심화영 기자 dorothy@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