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고도 완화로 15층 아파트 허용
공공기여 의무 10%→0%로 줄어
市 “정비사업 기간 13년으로 단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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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오세훈 서울시장이 중구 신당9구역에서 ‘주택공급 촉진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 사진 : 박호수 기자 |
[대한경제=박호수 기자] “빵꾸 난 천장을 장롱이 받치고 있어요.”
서울 중구 신당동 골목 어귀, 습기가 눅진하게 배인 벽을 따라 걸어 들어가다 만난 원숙영(가명·65세)씨는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꺼내 보였다. 화면엔 곰팡이와 물자국으로 얼룩진 안방 천장이 찍혀 있었다.
“윗집 보일러에서 물이 새요. 천장이 내려앉을까 봐 장롱을 세워 받치고 있어요. 몇 번이나 테이프 붙이고 덧댔는데 또 새더라고요.” 그가 이곳으로 이사 온 건 1988년. 갓 돌을 지난 셋째 딸을 안고 골목으로 들어왔고,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을 계단 위 작은 집에서 버텨냈다. “그때 다른 데 갔으면 아파트 벌써 들어갔겠죠. 그런데 이 골목 택한 뒤로는 매년 비 새고, 곰팡이랑 같이 살아요. 언젠가 시장님 오시면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사진 찍어놨었죠.”
지난 24일 오후, 오세훈 서울시장이 찾은 신당 9구역은 서울 한복판에 숨겨진 도시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방수포를 덮은 지붕과 기울어진 담장이 골목마다 어지럽게 이어졌고, 한 사람이 간신히 오를 수 있는 가파른 계단을 연로한 주민들이 묵묵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남산 자락이라는 이유로 1970년대부터 고도지구로 묶인 이곳은 지난 20년 동안 정비사업이 수차례 추진됐지만 매번 무산됐다. 조합원들이 동의해도 시공사는 오지 않았다. 건물을 7층 이상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서울시가 발표한 ‘2030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 기본계획’이 흐름을 바꿔놓았다. 고도제한이 28m에서 45m로 완화되면서 신당9구역은 최고 15층 아파트 건립이 가능해졌다. 용적률은 250% 이상으로 확대됐고, 공공기여 의무도 10%에서 0%로 줄었다. 서울시가 지정한 ‘규제 철폐 3호’ 첫 사례였다.
오세훈 시장은 현장에서 “신당9구역은 서울시 공급 전략의 상징적인 모델이 될 것”이라며 “조합이 혼자 끌고 가는 시대는 끝났다. 서울시가 직접 관리하며 모든 단계별 기한을 설정하겠다”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이 구역을 ‘선도 매뉴얼’로 삼아 유사한 정체 구역에 전파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정비사업의 전체 기간을 기존 18~21년에서 13년으로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정비 단계별 처리기한제’를 모든 단계에 확대하고, 각 구역에 ‘공정촉진책임관’과 ‘갈등관리책임관’을 지정해 행정 병목을 줄이겠다는 복안이다.
이를 듣고 있던 주민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이날 한 신당동 원주민은 “우리야 큰 평수 원하는 거 없다. 그냥 25평, 죽기 전에 새집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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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신당9구역에서 ‘주택공급 촉진방안’. / 사진 : 박호수 기자 |
하지만 현실의 걸림돌은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튀어나온다. 사업 계획이 세워지고, 시공사가 뽑히고, 구청과 서울시가 도장을 찍어도, 정작 조합원이 집을 떠날 수 없다면 시작은 없다. 서울시가 속도를 높이겠다고 발을 구르는 사이, 한 조합장은 다른 톤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이날 신당 10구역 조합장은 “이주비 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주민들이 빨리 정비사업이 가도 이주를 갈 수 있을지 굉장히 걱정이 많다. 서울시에서 대출 규제 완화에 대한 방법이 있는지 검토해주시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오 시장은 “이번 대출 규제는 집값 급등에 대응한 비상조치였지만, 이주를 앞둔 조합원들에게는 선의의 피해가 될 수 있다”며 “이런 경우는 제도 취지와 무관하므로 예외 적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국토부에 건의했고, 실무 협의가 시작됐다. 서울에 유사한 사례가 몇 군데 더 있어 최대한 서두르겠다”고 밝혔다.
반면, 옆 동네인 신당 8구역 조합장은 “우린 대출 막차를 탔다”라고 표현했다. 벌써 작년 11월부터 이주를 시작해, 6월 30일 기준 이주율은 95%를 넘겼다. 이날 8구역 조합장에 따르면 이주비 대출도 모두 완료된 상태다. “지금은 남은 5% 미이주 세대만 설득하면 철거에 들어갑니다. 2029년 입주를 목표로 가고 있어요.”
신당9구역도 이곳 조합장에 따르면, 최근 사업성이 좋아지면서 건설사들이 수주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현재 네댓 개 건설사가 찾아왔는데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공사 계획이 있어도 이주가 막히면 다 멈춘다”는 것이 조합 측의 하소연이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수도권 주택 매입 시 6억원 초과 주택담보대출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자 현장에선 “수익형 분양이 아니라 실제 살고 있는 분들을 위한 정비사업인 만큼 시가 책임지고 공백을 메우겠다”는 오 시장 말처럼,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일부 주민은 “이주 시기에 대출이 안 될까”, “기존 집을 팔아도 갈 데가 없지 않을까”라며 우려를 쏟는다.
서울시는 실거주 중심의 공급을 강조하지만, 정작 실수요자들이 “실거주 목적의 고령층까지 대출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올 만큼 타격을 입고 있다.
국회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금융위원회의 이주비 대출 규제 정책 전면 재검토 요청’에는 12일 만에 1만5000명 넘는 동의가 이어지기도 했다.
박호수 기자 lake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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