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김호윤 기자] 1928년 런던 실험실의 ‘오염된’ 배양접시에서 탄생한 페니실린. 하지만 이 기적의 약물은 예상치 못한 ‘실수’에서 탄생했다.
1928년 런던 세인트 메리 병원의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는 2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실험실로 돌아왔다. 정리하던 중 포도상구균 배양접시 하나에서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푸른 곰팡이가 자란 부분 주변의 세균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던 것.
플레밍은 이 곰팡이를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으로 분류하고 분비물질을 ‘페니실린’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당시 기술 한계로 대량 생산이 어려워 주목받지 못했고 1929년 발표한 논문은 당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10년 후인 1939년 옥스퍼드대학의 하워드 플로리 교수와 에른스트 체인 박사가 플레밍의 연구를 재발견했다.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체인은 나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상황이었고, 전쟁 임박으로 항균제 개발은 절박한 과제였다.
1940년 실시된 동물실험은 극적이었다. 치명적 세균에 감염시킨 실험쥐들 중 페니실린을 투여받은 쥐들만 생존했다. 플로리는 “의학사상 처음 보는 결과”라고 당시 기록에 남겼다.
영국 내 폭격 위험으로 플로리는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가 협력을 요청했다. 미국 정부는 페니실린을 전시 최우선 프로젝트로 지정했다.
흥미롭게도 대량생산의 열쇠는 일리노이주 시장의 썩은 멜론에서 찾아졌다. 1943년 발견된 이 멜론의 곰팡이는 기존보다 훨씬 많은 페니실린을 생산할 수 있었다. 여기에 옥수수 우린 배양액이 더해지면서 미국의 페니실린 대량생산 체계가 완성됐다.
이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연합군은 본격적으로 페니실린을 사용했다. 미군 의료기록에 따르면 페니실린 도입 전후로 전상자의 감염 사망률이 크게 감소했다. 전후 민간 보급이 시작되자 페니실린은 의료계를 혁신했다. 폐렴, 매독, 패혈증 등 당시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질환들이 치료 가능해졌다.
이 같은 공로에 1945년 플레밍, 플로리, 체인은 공동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진짜 공로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의학사 전문가들은 “플레밍의 발견, 플로리와 체인의 실용화가 모두 필수적이었다”며 “세 사람 중 누구 하나라도 없었다면 페니실린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과학계에서는 “오염된 배양접시를 그냥 버리지 않고 관찰한 플레밍의 호기심, 10년 묵은 논문에서 가능성을 본 플로리와 체인의 혜안이 만들어낸 기적”이라는 것이 과학계의 평가다.
다만 페니실릴은 페니실린 남용시 내성균 출현이 나타날 수 있다. 플레밍은 이미 1945년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페니실린 남용 시 내성균 출현을 경고했다. 실제로 1960년대부터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보건기구는 현재 항생제 내성을 ‘글로벌 보건 위기’로 규정하고 있다. 내성균으로 인한 사망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새로운 항생제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다.
현재도 전 세계 연구진들은 차세대 항생제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어쩌면 다음 기적의 약물도 어느 실험실의 예상치 못한 ‘실수’에서 탄생할지 모른다.
김호윤 기자 khy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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