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과 미(美), 무욕(無慾)에 대한 신(神)의 가호가 있어야만 인간의 삶과 예술은 향기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때 ‘한국 화단의 여걸’로 통했던 천경자 화백(1924~2015)은 평생 이 말을 진리처럼 여겼다.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여성 화가로서 마주한 그는 여자의 얼굴을 통해 한민족의 애절한 통한과 아름다움, 무욕의 정신을 화폭에 풀어냈다. 그의 작품 속에 여자들이 자주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천경자의 '미모사 향기' 사진=서울옥션 제공 |
천경자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여인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잡아낸 ‘미인도’ 시리즈를 비롯해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의 그림, 추상화가 이우환과 이강소의 작품, 한국화 거장 운보 김기창의 수작 등 국내외 유명 미술가들의 작품이 대거 경매에 부쳐진다. 서울옥션이 오는 26일 오후 4시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여는 제185회 미술품 경매를 통해서다. 출품작은 총 94점으로 낮은 추정가 총액은 약 61억원 규모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작품가격이 조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기업이나 거액 자산가 등 ‘큰손’ 컬렉터들이 매수세에 적극 합류할지 주목된다. 출품작들은 대부분 시중보다 20~30% 낮은 가격대에서 경매를 시작한다. 그림이 필요한 기업은 물론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주부, 직장인, 학생 등이 현장 방문, 서면, 전화를 통해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
서울옥션은 이번 여름 세일 행사를 국내외 컬렉터를 흥분시킬 만한 근현대미술 섹션과 한국 전통 예술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고미술 섹션으로 나눠 진행한다.
먼저 근현대미술 섹션 경매에서는 천경자의 1977년 작 ‘미모사 향기’를 ‘얼굴 상품’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외로움과 고독에 싸인 여인이 물끄러미 화면 밖을 응시하는 모습을 차지게 잡아낸 작품이다. 동공이 강조된 여인의 눈은 보는 이의 시선을 멈추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 여인의 머리에 얹은 꽃과 나비 등에 집중된 높은 채도의 색은 작품 전체적으로 감도는 관조적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시각적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수에 젖은 검은 눈매에 얼핏 비치는 설렘은 고독한 감정을 극대화한 장치로 여겨진다. 경매 추정가는 5억~8억원이다.
미술시장의 블루칩 화가 이우환의 1990년 작품 ‘바람과 함께(With Winds)’시리즈도 나와 있다. 역동적인 움직임과 강한 붓터치를 담았던 이전의 ‘바람으로부터(From Winds)’ 연작과 비교해 가벼운 움직임이 감지되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분위기 또한 캔버스의 공간이 점차 가라앉으며 수그러드는 양상을 보인다. 이옥경 서울옥션 부회장은 “이 작품은 신체적 행위를 화면에 담아내면서 보이지 않는 공간의 역동성을 차분하게 묘사했다”며 “작가의 ‘조응’시리즈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특성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추정가는 9억원이다.
이강소의 200호 크기의 대작 ‘무제’ 역시 모처럼 입찰대에 오른다. 오리들의 유연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한 작품이다. 붓질을 통해 고정된 사물 보다는 변화하는 과정을 잡아낸게 이채롭다. 이 화백은 1980년대 후반부터 오리, 사슴, 나룻배가 등장하는 풍경화에 주목해 왔다. 이강소는 그동안 오리와 물이라는 전통적 소재를 활용하되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움직임이 지닌 특징을 몇 개의 획으로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처리해 국내외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앤디 워홀의 '달러 사인' 사진=서울옥션 제공 |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의 작품 ‘달러 사인(Dollar Sign-4억5000만~8억원)’과 ‘캠벨수프 II(Campbell's Soup II-5억~10억원이다.)“도 나란히 새 주인을 찾는다. ’달러 사인‘은 미국 화폐의 달러 기호를 화면 가득 담아 아메리칸 드림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욕망과 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시각화 했다. 빠르고 생동감 있게 표현된 달러 사인과 그 주위의 보라색이 대비를 이루어 당시 대중매체로 화려하게 물든 미국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캠벨 수프 II‘ 역시 똑같은 크기로 반복 배열된 수프 깡통을 통해 산업사회의 매스미디어 문화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가난한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워홀은 어린 시절부터 할리우드 스타를 동경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데 주력했다. 카네기멜론대를 나와 뉴욕에서 상업 디자이너로 성공한 그는 산업사회의 현실을 미술 영역으로 끌어들여 ‘팝아트’라는 새 장르를 개척했다. 워홀의 걸작 ‘실버 카 크래시(이중 재난)’는 2013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예상 낙찰가인 8000만달러를 넘는 1억500만달러에 팔려 화제가 됐다.
윤병락의 '가을 향기' 사진=서울옥션 제공 |
하이퍼리얼리즘(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린 그림)의 40대 대표작가 윤병락의 사과 그림 ‘가을 향기’(51x48.7cm)도 출품됐다. 윤씨의 사과 그림에는 인간의 풍요와 욕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잔잔한 빛과 색감이 화면 깊숙이 끼어들고 정적과 평안, 고요를 마음껏 발산한다. ‘사과보다 더 사과’ 같아 사진처럼 보이는 이 작품의 추정가는 1400만~2500만원이다.
고미술 섹션에는 조선 후기 고위 사대부의 모습을 담은 ‘조숙하 초상’(4000만~1억원)이 단연 돋보인다. 전형적인 공신 초상화로 눈매와 입술, 터럭의 묘사가 섬세해 인물이 더욱 선명하고 입체감 있게 느껴진다.
고정호 서울옥션 홍보팀장은 “이 작품과 함께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숙하의 또 다른 초상화 한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는데 출품작과 형식상 차이가 커 눈길을 끈다”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작에는 여러 기물이 놓인 서안이 앞에 놓여 있어 인물보다는 사물의 표현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출품작은 한 인물의 공적인 위엄과 사적인 인품을 각각 어떻게 시각화했는지 연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고 설명했다.
조선 말기 인물화가 석지 채용신의 ‘신기영 초상’(1억3500만~2억원)도 경매에 오른다. 당대 유학생 소곡 신기영의 20세 모습을 되살려낸 작품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한국 전통 초상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실외를 배경으로 한게 특징이다.
서울옥션 측은 “배경 속 암석 앞에 배치된 비석과 작품 뒷면의 묵서를 바탕으로 이 작품이 고종 황제의 탄신일을 맞아 화양산에서 황단제를 주관했던 인물들의 의식 장소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고 해석했다.
근현대 한국화 거장 운보 김기창가 원시예술의 향수를 시각화한 추상 작품 ‘태고의 이미지’도 출품됐다. 동양정신의 상징인 '돌'과 '돌이끼'로 인간의 역사를 표현하고자 했던 운보의 도전 정신이 돋보인다. 원시적이고 단순화된 구성과 마띠에르를 보는 것과 같은 재질감은 운보만이 가능한 전통의 현대적 표현법을 보여준다.
출품작들은 경매당일인 26일까지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누구나 무료로 만날 수 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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