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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을 쏙 빼닮은 단색화...40년 미술인생의 결기와 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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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08-28 14:40:51   폰트크기 변경      
1.5세대 단색화 대표주자 이희돈 화백, 8월28일~10월3일 청담동 보자르갤러리서 개인전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브랜드는 뭘까? 대부분 사람들이 이 질문에 고개를 가우뚱하며 대답하기를 주저한다. K-팝과 K-푸드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K-아트는 아직 구체적 실체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 화단에서 통용되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상품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미니멀리즘 계열의 추상 회화 ‘단색화’란 장르다.  단색화는 1970년대 국내 화단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군사 독재정권이란 암울한 시대에 작가들은 저항적 의미보다는 그저 순백의 캔버스 위에 반복적인 신체 행위를 통해 세계와 자아, 물질계와 정신계가 합일되는 직관적 깨달음을 펼쳤다. 사회 정치적 메시지 덧대는 것을 거부하며 한국 고유의 전통성과 함께 내면 깊이 자리한 자유의 열망을 담아냈다. 작가마다 선택한 한지, 면포, 삼베, 골판지 등의 재료에 무한 반복의 수작업으로 단색의 물성(物性)을 화면에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희돈 화백이  전시장에 걸린 작품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김경갑 기자


 이런 K-모노크롬 회화는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 전을 계기로 국내외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실 ‘단색화’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정착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작고한 윤형근 박서보 조용익을 비롯해 정상화 하종현 등 기라성 같은 단색화 작가들은 50년 넘게 국내외 화단을 누비며 K-아트의 위상을 드높였다. 단색화 열풍이 이어지면서 국제 미술계의 ‘큰손’들의 콜렉션이 이어지고, 작가군의 외연도 자연스럽게 넓어지고 있다.

이희돈을 비롯해 김춘수 김택상 제여란은  1세대 단색화가들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이른바 1.5세대 작가들이다.  1세대 작가들이 좀 더 서구적인 방식으로 시각 언어를 표현했다면 이들은 전통적인 기법을 가미해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찾는 단색화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단색화 1.5세대 대표주자로 꼽히는 이희돈 화백이 다시 한번 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속풀이 마당을 연출하며 붓끝으로 세상을 깨운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보자르갤러리에서  28일 시작해 10월 3일까지 여는 개인전을 통해서다.

‘필연(必然)-인연을 넘어 필연으로 마주하다’란 철학적 주제를 걸고 강화도에서 몸부림치며 작업한 미학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매일 10시간 넘게 작업실에 파묻혀 죽어라 그림에만 매달려 대차게 꾸린 10호 소품에서 100호에 달하는 근작 ‘인연’ 시리즈 30여 점을 풀어놓는다.

이희돈 화백의'인연'                                   사진=보자르갤러리 제공


화려한 단색조의 직물이 펼쳐져 있거나 나무뿌리가 뻗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들이다. 골판지 위에 그물망이나 스테인리스 망을 격자형으로 배열하고 20~30차례 반복적으로 물감을 올려 작업한 단색화의 미감들이 잘 드러나 있다.

이 화백은 1990년대 후반 골판지에 작은 구멍을 촘촘하게 뚫는 타공 기법에 착안해 이를 자신의 조형 언어로 채택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세 번이나 입상한 그는 닥나무를 빻아 만든 물감으로 발명 특허도 취득했다. 2015년 부산아트페어에서는 인도의 5대 재력가 베누 스리니바산 TVS모터스그룹 회장(81)이 이 화백의 작품에 반해 대작을 구매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인천 강화군 불은면 고능리 446의 1 일대에 스튜디오를 겸비한 미술관(이희돈뮤지엄)을 짓고 지역 주민들과 문화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 메이저화랑인 사치갤러리의 러브콜도 받았다.

최근 강화도 작업실에서 만난 이 화백은 “나는 어떠한 형태도 그리지 않았다. 작은 이미지조차도…”라고 말할 정도로 특정한 사물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림의 요체로 꼽은 촉각과 정신, 행위는 한 공간에서 겹치거나 서로 맞물리며 ‘인연’이란 지점을 향해 퍼져 나간다.

전시장을 채운 30여 점의 단색화는 회화적 상상력과 감성적 에너지를 단순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응축해서인지 화려한 원색의 미감을 힘껏 뿜어낸다. 실제로 이 화백은 순백의 격자 캔버스 화면 위에 반복적인 신체 행위를 통해 세계와 자아,  물질계와 정신계가 합일되는 직관적 깨달음을 펼쳐왔다. 사회 정치적 메시지를 덧대는 것을 거부하며 한국 고유의 전통성과 함께 내면 깊이 자리한 자유의 열망을 담고 있는 게  이채롭다. 
  작품 소재를 주로 불교에서 찾는다는  이 화백은 화엄경에 나오는 ‘인다라망(因陀羅網)’의 글귀를 평생 화제(畵題)로 삼아왔다.  불교 신자는 아니 지만 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희돈 화백의 '인연'                                                                         사진=보자르갤러리 제공


그의 대표작 ‘인연(緣)’ 시리즈는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마치 아리랑 선율처럼 풀어내 다소 음악적이다. 강렬한 색감의 움직임을 통해 관람객과의 소통을 꾀하면서 ‘단색화의 힘’을 보여준다.


그는 붓질이 이어질수록 변화하는 그림 맛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강화도 작업실에 캔버스를 펼쳐 놓고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이상 작품을 구상합니다. 그림은 술친구 같은 것이죠.  제가 운영하던 화방을 자주 찾은 도상봉, 손응성, 조용익, 이왈종 화백을 스승으로 삼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내 몸과 마음을 다 써버릴 작정입니다.”

강렬한 원색 물감을 그물망에 수놓으며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 화백은 “디지털시대에도 화화는 죽지 않는다”며 자신의 단색화에 대한 특징을 설명했다.

“제 그림은 무수한 공존의 관계를 일깨워 주는 마음의 통로로 이해됩니다. 붓과 물감, 캔버스는 인연을 녹여내는 ‘꽃씨’이고요. 가령 화면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물감을 올리는 일련의 작업 과정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작업 자체가 힐링인 동시에 끝없는 수행이지요. 한국적인 애환을 담아 아리랑을 빼 닮은 작품을 만들어내는게 제 목표입니다. ”

미술평론가와 갤러리스트들 역시 “이 화백의 작품은 탈아(脫我)의 경지에 들어서려는 행위의 반복을 색채언어로 승화한 시각예술”이라고 격찬했다.
 미술평론가 윤진섭 씨는 “무한 반복의 수작업으로 물성(物性)을 화면에 드러낸다”며 “화업 내내 컴컴한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두레박’을 건져올리는 ‘색의 마술사’ 역할을 자처한 아티스트”라고 평했다.
 미술평론가 김윤섭 씨도 “현대인의 삶과 중첩된 물질 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의 감성을 치유하듯 일종의 자가 처방전을 화면에 담아내려 한 이 화백의 미학이 돋보인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색깔은 사람을 담는 그릇”이라며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색채(희망)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아내려 애쓰는 작가의 열정이 도드라진다”고 덧붙였다.

미술시장 전문가 이경택 씨는 “형상만을 보려는 사람들은 이 화백의 그림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며 “작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과 아우라가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이유”라고 했다. 

이 화백의 작품들을 소설이나 시처럼 여운이 묻어나는 것처럼 문학적 상상력을 최대한 응축했다는 평가도 눈길을 끈다.   문학박사 오현금 토포하우스갤러리 대표는 “단순한 외적 형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니 만큼 스피드한 리듬감과 스토리를 확장하는 것이 이 화백 미학의 백미”라고 강조했다.
 허성미 보자르갤러리 대표는 “회화란 내적 실재를 발견하는 통로”라며 “가령 화면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물감으로 평면 작업을 해가는 일련의 작업은 행위(묘사)는 물론 문학적 스토리(질감)와 철학까지 추상적 색채미학으로 승화시키는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10년 전 화방을 아예 접고 그림이 더 ‘고파’ 궁리했던 화가의 끝없는 미술수행이 이제는 현란한 색채와 인연의 흔적으로 피어나고 있다. 그의 얼굴엔 허허로움이 스쳤다. 저 멀리 마니산의 끝자락이 내려다보이고 뒤론 야트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배산임수형 길지에서 매일 물소리, 바람소리와 합주를 하겠단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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