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처음부터 직위에 걸맞은 역량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그 자리에 앉아 책임을 지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역량이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잠재력과 적응력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배어 있는 격언이다.
승진은 이 공식을 시험하는 대표적 계기가 된다. 특히 관료 조직에서 승진은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웬만큼 잘못된 인사가 아닌 이상, 직위와 역량이 크게 어긋나는 경우는 드물다.
정무직과 선출직은 사정이 다르다. 정무직에선 ‘발탁 인사’나 ‘낙하산 인사’처럼 정무적 고려가 작용하는 경우가 있고, 선출직은 ‘운칠기삼(運七技三)’과 맞물린 선거라는 변수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직위와 역량의 등가’가 깨질 위험성이 높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부등가’의 가까운 사례다. 검찰총장 사퇴 후 정계 입문 수개월 만에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정치는 검찰과 전혀 다른 세계였다. 대통령은 외교·안보·경제·사회 등 국가 전 분야를 조율하는 종합 리더십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은 검찰 재직 시절의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권력 정점의 자리가 본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무대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계를 드러내는 종점이 됐다. 비상계엄이라는 무모한 선택은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국정 판단력조차 상실했음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였다.
그에 비해 이재명 대통령은 윤 전 대통령과는 반대 사례로 짚어볼 만하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와 맞붙을 때만 해도 그는 ‘변방의 정치인’으로 통했다. 중앙 정치권에 지지 기반이 허약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후 그의 궤적은 거의 수직 상승에 가까웠다. 2018년 경기지사 선거에서 승리해 3년 넘게 도정을 이끌었고, 2022년 대선에선 민주당 후보로 본선에 올랐다. 비록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에게 패했지만, 같은 해 민주당 당대표에 올라 당권을 장악했고, 2024년 연임에 성공했다. 이듬해 2025년 조기대선에선 승리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직위 상승과 역량 성장의 궤적이 거의 동시에 그려졌다고 봐야 한다. 물론 아직 임기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단정은 위험하다. 하지만 다년간 선출직 경험 속에서 성장한 전력이 있는 만큼, 최소한 윤 전 대통령처럼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우를 범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두 사람의 성패를 가른 핵심적 요인은 ‘통합 리더십’이었다. 대통령은 무엇보다 분열된 사회를 아우르는 통합 능력이 요구되는 자리다. 윤 전 대통령은 이를 인식하지 못했고, 늦게라도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과거 방식과 습성을 그대로 고수하다 중도에 좌초했다. '과거 방식 그대로'는 인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고교 선후배를 국방장관과 방첩사령관에 중용해 비상계엄의 핵심 역할을 맡긴 데서 인사 스타일이 얼마나 폐쇄적인지를 읽을 수 있다. 적재적소 인사나 국민 통합을 고려한 탕평 인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대통령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다. 아직 대통령으로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난하다. 전임자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통합 리더십을 국정 운영의 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직위–역량 불균형’의 위험성은 여야 지도부에서도 감지된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그렇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함께 둘 다 강성으로 좌우 극단세력의 지지를 업었다는 점에서 불안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정 대표는 체급이 다르다. 그는 2004년 17대 국회에 입성해 20년 넘게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중진이다. 그에 비해 장 대표는 국회 입성 3년 남짓으로 정치 경력이 짧다. 앞으로 정통 보수정당의 대표 자리에 걸맞은 통합형 지도자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윤 전 대통령의 전철을 되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단적으로, 내년 지방선거에 앞서 중도보수층의 지지를 회복하지 못하면 ‘선거패배 책임론’에 휘말려 2년 임기도 못 채울 수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제가 언제나 참은 아니다. 어떤 정치인은 자리를 통해 성숙하지만, 어떤 이는 자리 때문에 무너진다. 그 차이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변화 여부에 달려 있다. 직위 상승에 맞춰 성장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자리는 진정 사람을 새로 만드는 무대가 될 것이다.
권혁식 논설위원 kw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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