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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서부 원주민인 푸에블로족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1980년대 후반, 뉴멕시코주 주도 산타페(Santa Fe)를 방문하면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 산타페 국제민속박물관에서 열린 한 축제에서 한국인과 닮은 외모의 한 젊은 여성을 보고 우리 국민일 것이라 짐작해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녀는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인 푸에블로(Pueblo)족의 후손이었다. 푸에블로 신화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들은 차갑고 축축하며 어두운 지하 세계를 오랜 세월 여행하다가 마침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남서부의 땅에 도달했다고 전해졌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 인류 이주의 광범위한 흐름과 조상들이 남긴 유산의 지속적인 의미가 뇌리에 깊이 스쳤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은 최근 국내 학계의 연구 성과와도 맞닿아 있었다.
국내 고고학계의 원로이자 아메리칸 인디언 연구의 권위자인 최정필 세종대학교 명예교수(역사학과)가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 서사로 기록된 생존과 부활의 디아스포라’를 출간했다.
이 책은 흔히 ‘인디언’ 혹은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 불리는 이들의 기원이 한반도 북부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이다. 이는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고고학·인류학·지질학·유전학 등 수십 년간 축적된 연구 성과를 종합한 결과다.
인류사의 가장 긴 여정
최 교수는 2만 년 전 빙하기, 베링해협이 육지였던 시절, 동북아시아 말기 구석기인이 신대륙으로 이주하며 시작된 여정을 추적한다. 이주민들은 북미와 남미 전역으로 퍼져 나가며 고대 문명을 형성했다. 그들은 옥수수·감자·고추 등 세계적 농작물을 개발했고, 피라미드와 도시 문명을 건설해 이집트·메소포타미아 문명에 견줄 업적을 남겼다. 이는 인디언들이 결코 ‘야만인’이 아니라 인류사에 큰 기여를 한 주체임을 보여준다.
우리와 닮은 유전자
이와 같은 주제를 반세기 넘게 연구해온 최 교수는 독자와 함께 인류사의 가장 긴 여정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한다. 만약 네이티브 아메리칸(Native American)의 얼굴에서 우리의 흔적을 느낀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한다.
마음 속에 세계지도를 펼쳐보자. 이야기의 출발점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자락이다. 그곳에서 혹독한 기후의 베링 해협을 건너 북미 대륙에 이르는 여정과 이주·생존의 기록은, 문화적 정체성과 뿌리를 향한 인간 본연의 질문을 되살리게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잊혀온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고, 지워진 이야기들을 되살리려는 시도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무심히 지나쳐온 그들의 삶, 그리고 우리가 놓쳐온 인간다움에 대해 다시 묻는다. 그들의 공동체가 지닌 신화와 문화에서 우리와 닮은 색가 비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 아닐까.
국내 최초의 체계적 저술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인디언 관련 서적들은 단편적이거나 비전문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이번 책은 최 교수가 지난 반세기 동안 직접 발굴과 현장조사에 참여하며 축적한 연구를 토대로, 북미 선사시대부터 마야·아즈텍·잉카 문명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한 국내 최초의 저술이다. 주제별 구성을 통해 흥미로운 부분부터 자유롭게 펼쳐 읽을 수 있다. 또한 고고학 지식이 없는 독자도 한편의 대서사시에 빠져들 듯, 쉽게 몰입해 읽을 수 있는 인문학 교양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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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필 교수 신간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 표지(주류성 출판사) |
학문과 문화교류에 바친 삶
경주 출신인 최 교수는 평생을 신라 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존에 평생을 헌신한 부친 고(故) 최남주 선생의 뜻을 이어, 고고학과 문화유산 연구에 전념해 왔다. 그는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인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펜실베이니아 고고·지질 연구소 연구원과 피츠버그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세종대학교 교수, 박물관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박물관학회 회장, 문화재위원, 유네스코 위원,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장, 유럽-아시아박물관연맹 부회장,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이사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 국제 문화교류에도 기여했다. 그 공로로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원로 부문)’을 수상했으며, 특히 한국과 스웨덴 간 문화 교류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아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북극성 훈장(Sweden’s prestigious Royal Order of the Polar Star)을 받았다.
최정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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