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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경제=정회훈 기자] 폭력이 사랑, 또는 유희일 수 있을까.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 행위자와 피행위자의 시점을 달리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박금산 작가는 최근 발간한 <믿음 소망 그리고 호랑이>에서 폭력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이야기는 주인공 요한나가 안전한 밤 산책을 돕는 맹견 릴리를 데려오면서 시작한다. 릴리의 목줄을 붙들며 안도감을 느끼던 요한나는 어느 날 자신을 따라오던 남자와 맞닥뜨리고 위협을 직감한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요한나는 릴리를 대여받았을 때 들었던 당부, ‘절대 목줄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무시한 채 손에서 목줄을 놓아 버리고, 릴리는 남자에게 돌진해 그를 죽이고 만다.
두려움 때문에 어느 으슥한 동굴에 릴리를 묶어 둔 채 달아난 요한나. 이후 주위에서 수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바로 남자의 가슴을 물어뜯었따는 동물이 호랑이었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요한나의 집 초인종이 울린다. 인터폰 화면에 비친 것은 사람이 아닌 바로 호랑이.
지금의 폭력에서 출발한 소설은 이후 요한나의 엄마, 조모, 증조모, 고조모로 이어지는 연대기적 폭력으로 확장된다. 제주 4ㆍ3사건, 노근리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뿐 아니라 난징, 오키나와, 오데사 등 폭력이 발생한 장소의 외연도 넓어진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상식적 또는 학습적으로 받아들였던 폭력의 베일을 벗긴다. 같은 폭력도 처해진 상황과 시기에 따라 정당화내지 미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를 테면 교황청이 사회주의자를 몰아내려고 제국주의자와 손을 잡거나, 노근리 학살 당시 이를 고발한 영국 기자가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식이다.
고린도전서 13장13절에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으뜸은 사랑’이라고 했다. 또한, 13장7절에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리라’고 했다. 하지만 작가는 사랑 자리에 ‘호랑이’를 넣었고, ‘모든’이라는 명제도 거부한다.
사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적지 않다. 가깝게는 ‘사랑의 매’가 그렇고,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 역시 알고 보면 이념의 사랑, 체제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피사랑자’ 입장에선 이는 폭력으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작가가 믿음과 소망 다음에 호랑이를 내세운 것이 흥미롭다. 일견 맹수의 왕이라는 점에서 폭력에 가깝게 느껴지겠지만, 소설 속 호랑이는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다. 해서 작가는 “전쟁과 일상의 폭력에서 강요받는 공포를 환희로 바꾸려고 독기를 품었다”고 했다. 이어 “(환희로 이어지기까지) 찾고 개발해야 할 것은 ‘용기’임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글로벌적으로 확증편향이 난무하는 요즘, 그 속에서 피아를 구분 짓고 적대시하는 요즘,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서슴지 않은 요즘 <믿음 소망 그리고 호랑이>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용기가 왜 필요한지 일깨운다.
판타지적 서사로 쓰인 소설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우리에게 낯익은 장편소설의 독법으로 온전히 읽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 생각ㆍ상상의 공간을 넓혀준다. 또 등장인물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인 여자란 점은 그 공간의 깊이를 더한다.
전남 여수 출생인 박금산 작가는 고려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 200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소설의 순간들> <점점 가까워지는 국화> <AI가 쓴 소설> 등을 출간했다.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고,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본명은 박영준이다. 문학수첩. 값 1만6000원.
정회훈 기자 ho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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