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증 이미 반납했는데…”
본인 확인 방법 없어 발동동
추석 앞두고 우체국 택배 마비
화장장 시스템 불통에 전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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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 본원 화재로 전산망 마비 사태가 나흘째 이어지는 29일 오후 서울의 한 시중은행에 관련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 사진 : 박호수 기자 |
[대한경제=박호수 기자]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은행에 왔는데, 면허증을 이미 반납한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2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시중은행 창구. 1941년생인 김모(84)씨는 추석을 앞두고 정부 긴급 민생지원금을 신청하려 했지만,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여파로 주민등록증 본인 확인이 막히면서 결국 허탕을 쳤다. 직원은 운전면허증이나 여권, 혹은 화재 발생 전 발급된 모바일 신분증을 요구했지만 김씨는 이미 면허증을 반납한 상태였다. 그는 “이 나이에 무슨 면허증이냐”며 한숨을 내쉰 뒤 발길을 돌렸다.
이날 오전 서울 성동구의 한 은행 창구도 북적였다. 추석을 앞두고 온누리상품권을 사러 온 어르신들이 잇따라 “주민등록증이 먹통이라 인증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창구 직원은 “오늘만 해도 발길을 되돌린 분이 한둘이 아니다”라며 “명절 앞 가장 기본적인 금융 수요조차 막혀 주민들이 크게 당황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에서 UPS용 리튬이온 배터리 교체 중 발화한 불길은 단순한 화재에 그치지 않았다. 정부 행정정보시스템 647개가 무더기로 멈춰 서며, 화재 발생 나흘째인 29일 오후 3시 기준 복구된 것은 62개에 불과하다. 특히 전산실 전소로 피해를 입은 96개 핵심 시스템은 대구 민관 클라우드센터로 이전해야 해 복구에 최소 4주가 소요될 전망이다.
은행권은 주말부터 비상대응체제로 전환했다. 일부 대출 심사는 공공 마이데이터 중단으로 막혔고, 카카오뱅크와 토스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은 고객이 소득ㆍ재직 증명 서류 이미지를 직접 올리도록 안내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면 창구가 없는 은행일수록 혼선이 크다”며 “고객 불만을 줄이려고 하루에도 수차례 지침을 바꾸고 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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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구청에 설치된 무인민원에 일부 서비스가 제한될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사진 : 박호수 기자 |
우체국 현장도 추석 물량에 화재 여파가 겹치면서 혼란이 커졌다. 서울 종로구의 한 우체국 창구에는 과일 상자를 든 시민들이 줄을 섰다. 하지만 직원은 “신선식품 소포는 현재 접수가 불가능하다”고 안내했다. 황모(63)씨는 “얼린 국을 자녀들에게 보내려 했는데 전산망 때문에 막혀 황당한 상황”이라며 허탈해했다. 빠른등기 접수자들도 “제때 도착할지 불안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집배원은 “배송 기록을 수기로 남기다 보니 평소보다 업무가 지연되고 있다”고 전했다.
구청과 주민센터 민원실도 평소보다 북적였다. 무인발급기가 작동하지 않자 부동산거래신고와 인감 발급 등 20여 종의 민원을 처리하려는 시민들이 창구로 몰렸다. 이날 성동구청은 긴급 공지를 내고 “정부24 등은 대부분 정상화됐지만 일부 민원은 불가피하게 현장 접수를 받아야 한다”며 창구 인력을 증원했다. 재산세 납부 기한도 10월15일까지 연장했다.
관악구는 사건 직후 구청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재난안전대책본부를 꾸리고 전 직원 비상근무에 돌입했다. 민원 시스템 현황을 전수 조사해 SNS와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공지하고, 부동산 민원은 현장 접수 인력을 늘리며 세무 업무는 수기 처리로 돌렸다. 양천구 등 다수의 서울 소재 구청들도 이날 오전 긴급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점검했다.
중앙부처의 혼선도 적잖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출장 결재와 국제회의 준비를 수기로 이어갔고, 보건복지부의 화장시설 예약 시스템 ‘e하늘장사정보’는 여전히 불통이라 장례식장 직원과 유족들이 전화를 돌리며 빈자리를 잡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 장례식장 직원은 “20년 만에 화장장 예약을 전화로 처리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날 브리핑에서 “세금 납부 기한을 연장하고 오프라인 발급 수수료를 전면 면제하는 등 대체수단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김민재 행정안전부 차관은 “화재로 직접 피해를 본 96개 시스템은 대구센터로 이전해 복구할 계획”이라며 “국민 불편을 줄이기 위해 모든 행정력을 총동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장의 불신은 여전하다. 종로구청을 찾은 한 시민은 “전자정부가 자랑이었는데 배터리 하나에 무너질 줄은 몰랐다”며 “디지털 안전망을 믿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박호수 기자 lake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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