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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돌봄은 단절이 아닌 경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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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10-14 06:00:18   폰트크기 변경      

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


“구청장님, ‘경력단절여성’이라는 말이 저한테는 낙인처럼 들려요.”

10년 전 한 주민의 이 말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행정 용어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단절’이라는 표현은 출산과 육아, 간병의 시간을 공백으로 규정했지만, 실제로 그 시간은 치열한 돌봄과 기획, 위기 대응, 소통 능력이 축적되는 과정이었다.

나는 단어 하나가 시선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며, 결국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으로 2021년 성동구는 전국 최초로 ‘경력단절여성’ 대신 ‘경력보유여성’을 공식 용어로 채택한 「성동구 경력보유여성 존중 및 권익 증진 조례」를 제정했다. 돌봄의 시간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첫 시도였다. 단순히 단어를 바꾼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경험과 능력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 자체를 바꾸는 출발점이었다.

코로나19 시기 여성 고용률은 크게 감소했지만, 여성들은 집 안에서 감염병 대응, 학습 지원, 감정 조율을 책임지며 사실상 가정의 ‘재난 컨트롤타워’로 일했다. 직장에서는 자리를 비웠지만,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보다 분주하고 치열하게 하루를 보냈다. 돌봄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고도의 의사결정과 조정능력이 요구되는 노동이었다. 이 경험은 결코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 전문성이 더욱 깊어지는 과정이었다.

이 같은 경험을 제도로 연결하기 위해 성동구는 구청장 명의의 ‘돌봄 경력인정서’를 발급하고, 일정 기준의 돌봄 시간을 최대 2년까지 경력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경력인정 위커리어(WE CAREER)’ 프로그램과 ‘경력보유여성 취ㆍ창업교육’ 과정을 운영하며, 참여자들이 자신의 경력을 새롭게 정리하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며, 실무 코칭과 직무 체험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성동문화재단과 도시관리공단 등 산하기관은 물론 27개 민간기업이 재취업과 관련한 협약에 동참했고, 현재까지 325명이 교육과정을 수료해 100명이 실제 재취업과 창업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돌봄이 공백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임을 증명했고, 기업들은 새로운 인재를 발견했다.

경력보유여성들은 스스로의 경험을 경력으로 증명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과 돌봄을 병행하며 키운 역량이 조직 내에서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음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여성들은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줄어드는 양질의 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들의 도전과 성취는 성동구 정책의 가치를 더욱 높였고, 지금은 광역지자체를 포함해 전국 34개 지자체로 확산됐다. 지난달 22일에는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꾸는 내용의 법안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법안소위를 통과했다. 작은 언어의 전환이 결국 제도와 법률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재분배뿐 아니라 인정(recognition)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동의 ‘경력보유여성 조례’는 바로 그 인정에서 출발했다. 처음엔 가느다란 실 같던 변화가 이제는 사회 전반의 인식과 제도로 확장되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돌봄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며, 공백이 아니라 경력으로 다시 기록되고 있다.

나는 믿는다. 언젠가 누군가가 자신의 돌봄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작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성동에서 시작된 노력이 바로 그 길을 열고 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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