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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적 캔버스, 뻗어나간 공간…평면 회화 극복한 사과 그림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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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10-13 12:46:35   폰트크기 변경      
윤병락, 16일부터 노화랑서 개인전....신작 30여점 선봬

캔버스를 사과 상자처럼 입체적으로 전환
‘화화의 종말’ 부인하며 평면성 한계 극복
공간혁신 주의 미학 승화한 사과 그림 인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 전역에선 창의력이 바탕이 되는 화화 세계는 아마도 기계(사진)에 뺏기지 않을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예술이 대중화되면서 회화의 위상은 점차 허물어져 갔다. 급기야 20세기 말 회화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예술조차 종말 선언이 나왔다. 회화의 종말 그 이후를 살아가야 할 미술인들의 심각한 고민이 시작된 셈이다.

한국 화단 역시 평면적인 그림에 대한 대대적인 회의론이 들풀처럼 번졌다. 붓 끝에 녹아든 전통 그림들은 빠르게 디지털 아트나 조형아트로 대체되면서 미술의 진화가 본격 시작됐다.

하지만 일부 작가들은 ‘회화의 종말’을 극구 부인하며 그림의 재탄생에 열정을 쏟아냈다. 사과 그림으로 잘 알려진 유병락 씨도 참신한 회화 세계를 개척하는데 전면에 섰다. 2000년대 초반 그는 그동안의 작업을 뒤로하고 평면적 회화를 혁신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새롭게 붓을 들었다.  캔버스를 사과 상자처럼 변형시키고 그 위에 알토란 같은 사과들을 그려 넣어 화면 의 혁신을 꾀했다. 사물을 캔버스 안에 가두는 게 아니고 확장시켜 촉각·후각·미각을 모두 잡아내려 했다.  윤씨의 이런 도전은 결국 한국 화단에서 회화의 평면성을 넘어 무한히 공간을 넓혀 나가는 ‘K-아르누보’(새로운 미술)라는 평가를 받아냈다.


30년간 회화의 혁신에 열광하면서 그 영혼을 화폭에 담아낸 윤 씨의 그림 세계를 재조명할 기회가 찾아왔다. 오는 16일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개막해 다음 달 5일까지 이어지는 개인전 ‘사계’를 통해서다.

윤병락 씨가 13일 파주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모습.   사진=노화랑 제공


젊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한 사과를 모티브로 전통화화의 혁신을 꾀한 근작 ‘가을향기’ 시리즈 30여 점이 나와 작가의 예술적 위상을 음미해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작품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해부터  작업한 노란사과를 전면에 다수 배치했다. 

전시개막에 앞서 13일 경기도 파주 작업실에서 만난 윤 씨는 “시각적 자극이 홍수 같은 시대에 화화의 생존을 위해 처절한 투쟁은 30년간 지속됐다”며 “붓과 물감에 의존한 회화의 세계를 지키는 것이 내 미술 인생의 전부”라고 회고했다.

윤씨의 3차원 공간혁신 미학의 맹아는 우연에서 싹이 텄다. 그림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원하는 대로 공감각적 여운이 나오지 않자 화가 난 그는 캔버스를 사과 상자처럼 입체적으로 바꿨다. 그때 문득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사과 상자 같은 캔버스가 공간을 확장하는 매개체로 보인 것이다. 캔버스 변형을 통해 전통 회화의 평면성을 극복하려 했던 그는 나무판 위에 삼합지 이상의 두꺼운 한지를 붙이고 그 위에 유화 물감으로 두세 번 덧칠을 했다.  사과를 옆으로 쏟기도 하고, 궤짝에 신문지를 깔기도 하고, 파란 잎사귀를 올려보기도 하면서 부감법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다양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최근 들어서는 캔버스의 표면을 주변 공간으로 밀어 올렸다. 평면의 좁은 틈을 비집고 공간을 무한히 넓혀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려 시도한 것이다. 그러면 전시장 벽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했다.

윤병락 씨가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16일 개막하는 개인전에  출품한 '가을 향기'. 사진=노화랑 제공


결국 형태·색·소리를 담아낸 그의 작품들은 관람객의 움직임을 더해 4차원으로 뻗어 나간다. 실제로 윤씨의 공간 혁신주의 작품으로 초대된 관람객들은 스스로 그림의 일부가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제 작품을 사 간 애호가는 자신의 공간에 그림을 걸 때 사과 위치를 바꿀 수도 있을 겁니다. 상자 밖으로 굴러간 사과들의 위치를 그 공간에 맞게 배치하면 됩니다. 그렇게 관람객 참여를 통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윤씨의 사과 그림은 다른 화가의 작품과 섞어 놔도 딱 ‘병락이 것’이라고 짚어낼 수 있을 만큼 체취가 독특하다. 작가의 말마따나 “사과는 내 주변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공감을 주는 진실”일 만큼 섬뜩할 정도의 개성을 풍긴다. 오래 묵혀 발효하고 뭉그러진 색과 형태로 자신의 사과에 대한 열망을 뒤섞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의 사과를 그렸다. 사과를 통해 한국판 극사실주의 정신의 매듭을 잇고, 거기서 얻어진 화면은 희망찬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사과를 그린다기보다 인간의 행복과 자연의 결실이 분리되지 않는 순리를 사과를 통해 불러냈다는 얘기다.

공간혁신 주의 철학을 승화한 ‘윤병락 표’ 그림이 이처럼 인기를 끄는 까닭은 뭘까. 가장 큰 요인은 세대를 아우르는 ‘결실과 행복’을 감성적으로 터치하는 것이다. 결실의 계절에 느끼는 포만과 행복 등 풍부한 감성의 나래를 상상의 밑뿌리로 어루만진다. 작품 제목이 ‘가을 향기’인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향수를 자극한 것도 한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그는 “경북 영천에서 자란 기억과 농사의 소중함에서 예술의 원천을 뽑아낸다”고 했다. “벼농사를 하는 부모님의 소중한 땀방울을 보며 자랐어요. 곡식은 땅이라는 캔버스에서 쉬지 않고 노동해야 잘 영글듯이 예술 역시 ‘영혼의 지문 같은 손맛’으로 쉼 없이 노력해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것 같아요.”

이처럼 10대나 20대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시각예술로 전해주고 중·장년층에는 유년시절의 땀방울을 되새기게 한 것이 주효했다. “제 작업은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감성을 접목하고 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것이지요. 제 작품에는 노랫말처럼 내레이션이 담겨 있습니다.”

윤병락의 '가을 향기'     사진=노화랑 제공


전시장에는 노랗고, 빨갛게 농익은 사과들이 마치 군무(群舞)를 하듯 서로의 동작과 맵시를 뽐낸다. 사과가 행복이 되고, 행복이 사과가 되는 경지를 꿰뚫은 예술가의 강건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붉은색, 초록색 광채를 뿜어내는 화면은 사과 상자의 바닥에 깔린 신문지와 어우러져 함부로 법접할 수 없는 숭고미를 만든다.

윤씨의 예술적 궤적은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한 몸이다. 196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경북대 미술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4학년 재학 중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에 당선될 정도로 묘사력이 뛰어났다. 1980년대 후반부터 초현실주의 화풍의 ‘인체’ 시리즈를 시작한 그는 고구려 기상과 한국 여인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거쳐 2003년 이후 전통 한지에 서양 물감을 쓴 ‘퓨전 한국화’ 사과 그림으로 진화해 왔다. 한국 여인의 혼이 담긴 반닫이 그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 걸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그림은 중·고교 미술과 국어 교과서 등 8곳에 실려 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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