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빛줄기가 어둠과 함께 넘실거린다. 칠흑 같은 어둠을 이제 막 깨우는 빛다발이 현대인의 무거운 어깨를 토닥거린다. 아픔과 절망을 어루만지는 ‘빛’이 필요한 시대에 국내 화단의 간판급 ‘불빛의 화가’ 김성호(64)가 붓끝으로 어둠을 깨부수는 이유다. 그렇게 화가로 40년의 긴 시간을 살아온 그를 또 한 번 전시장으로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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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호 화백이 21일 부산진구 갤러리 범향에서 개막한 개인전에서 출품작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성호 제공 | 
 21일 부산진구 갤러리 범향에서 개막한 ‘새벽’전은 김성호 화백이 화업 40년을 맞아 도심 불빛과 야경, 여명에 대한 감성의 실타래를 뽑아내는 특별한 자리다. 경기도 양평 서종 작업실에 파묻혀 죽어라 그림에만 매달려 대차게 꾸린 30여 점의 ‘그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김 화백은 “이번 전시는 정치·사회적으로 혼탁하고, 경제적으로 부대끼는 삶에서 ‘행복한 빛’를 퍼뜨리기 위한 시도”라고 했다. 경기불황의 장기화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이 화로에서 막 꺼낸 군고구마처럼 따뜻하다. 
  영남대 미대와 대학원을 나온 김 화백은 6년 전 깊은 산자락과 북한강 인근에 위치한 경기도 양평 서종으로 찾아들었다. 현대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환한 불빛으로 치환하기 위해서다.    그는 프랑스 인상파 거장 클로드 모네와 다르게 햇볕이 이글거리는 풍경이 아니라 불빛이 아른거리는 도심 야경에 붓을 고추 세워 작업했다. 희미한 불빛으로 물든 도시의 깊은 잠을 깨우며, 파라다이스 같은 환희의 순간을 낚아채는 재미가 쏠쏠했다. 
에스제이 탱크  본사 건물의 11층 전시장을 채운 ‘새벽’ 시리즈들은 회화적 사실성과 미학적 에너지를 선과 선명한 색채로 응축한 작품들이다. 백설이 빛나는 한라산의 자태, 불빛 아래 일렁이는 서귀포, 자동차가 꼬리를 문 을지로, 네온사인과 휘황찬란한 조명이 깜박이는 홍콩 마천루, 어둠을 가로지르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이 보는 이로 하여금 빛과 어둠이 상존하는 아스라한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리게 한다. 오로지 붓끝을 ‘불빛의 미학’의 극점으로 몰아붙이는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역작을 구상할까.
| 김성호의 '새벽-한라산' 사진= 갤러리 범향 제공 | 
  그는 도심 불빛의 생명력에 방점을 둔다. 사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우리가 유용한 것만 지각할 뿐이다. 각성을 하고 새로운 눈을 가져야만 우리는 비로소 신의 영역을 예측할 수 있다. 김 화백도 불빛 그 너머의 진정한 지각을 보았을 것이다. 신의 소리, 생명의 소리다. 아마도 김 화백이 붙잡고 싶은 그런 것일 게다. 
 실제로 그는 검정 파랑 노랑 회색 등 다양한 색감으로 풍경을 스케치한 다음, 불빛과 시간의 빠른 템포를 버무린다. 원경, 중경, 근경의 구도는 물론 하늘 위에서 보는 듯한 시점과 넓은 화면 대부분을 과감히 어둠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자연과 불빛이 하나가 된 풍경들은 그대로 화폭 속에 이야기로 들어앉는다. 중첩된 굵은 선묘와 감각적이면서 자유분방한 여백의 미도 매력적인 요소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네온사인이나 가로등, 자동차의 해트라이트 등 불빛은 밤의 몽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과거의 모든 추억을 되살려 줌으로써 상상력과 기억력이 일치하는 세계로 이끄는 일종의 징검다리다. 어두운 도심, 팽팽한 긴장감, 넓게 퍼져 있는 불안감 등 현대사회의 단면만을 골라 화면 깊숙이 채워넣기 때문이다.
  김 화백은 “야간의 불빛은 홀로 도심을 비추면서 홀로 꿈꾸는 인간 본래의 모습의 메타포”라며 “속으로 애태우면서 절망과 체념을 삼키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은 혼자 조용히 비추는 불빛의 이마주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술 평론가와 갤러리스트들이 김 화백을 화업 내내 수많은 사람들이 컴컴한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두레박’을 건져올리는 ‘불빛의 마술사’ 역할을 자처한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술평론가 고충환 씨는 “현대인의 삶과 중첩된 물질 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황폐해져가는 자신의 감성을 치유하듯 일종의 자가 처방전을 화면에 담아내려 한 김 화백의 미학이 돋보인다”며 “그에게 불빛은 세상을 깨우는 그릇이자 희망”이라고 평했다.
  그는 환갑을 넘어서 그림이 자신의 천직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림 이야기만 하면 여전히 신나는 홍조 띤 얼굴이 이를 말해 준다.
 “요즘 들어 작업실 주변의 이미지들이 새록새록 눈에 아롱거립니다. 꽃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통과한 아침 햇살이 너무 강렬했다. 침대에 누워 불빛의 생명력에 한동안 빠져들었다. 대가들이 그토록 빛을 찾아 나섰던 이유가 이런 것일 겁니다. 우주의 빛, 생명의 빛이었지요.”
 박성진  주식회사 에스제이탱크 회장 겸 갤러리범향 대표은 “단순한 외적 형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니 만큼 스피드한 리듬감과 스토리를 확장하는 것이 김 화백 미학의 백미”라고 강조했다. 
 미술계 인사들이 대체로 그의 작품을 ‘희망의 후광’과 ‘불빛의 리듬감’, ‘새벽을 여는 시적 아우라’라고 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 화백이 작품 앞에서 전시회 때마다 던진 한마디가 여전히 긴 여운으로 남는다.  “하필 새벽의 도심 불빛에 관심을 갖는 이유요?  어두운 것을 뚫어 주잖아요” 
 김경갑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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