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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정신동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 유병준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정연승 단국대 경영대학원장,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 유정희 벤처기업협회 본부장. /사진: 문수아기자 |
[대한경제=문수아 기자] 유통업체의 정산주기 단축 입법 논의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학계가 제도의 부작용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유병준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22일 ‘이커머스 정산주기 단축의 경제적 영향’토론회에서“독과점으로 보기 어려운 국내 이커머스 시장을 앞서 규제하면 중소상공인, 영세 플랫폼이 가장 큰 손해를 볼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 교수 연구팀이 정산주기를 60일에서 20일로 축소할 경우 빚어질 부작용을 실증연구한 결과 △입점업체 △소비자 후생 △직매입형 플랫폼 등의 경제적 손실은 47조7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가장 큰 피해는 영세 규모의 입점ㆍ납품업체 피해가 볼 가능성이 제기됐다. 연구 결과 정산주기 단축 후 최초 52주 동안 평균 74%의 업체만 플랫폼과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전자본 하위 50% 플랫폼의 생존율은 평균 48%까지 떨어졌다. 극단적 시나리오에서는 입점ㆍ납품업체 시장의 피해액이 1년간 최대 21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정산주기 단축으로 소상공인이 피해를 보는 현상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려하는 대목이다. 유럽 유통업 단체 유로커머스(EuroCommerce)는 모든 B2B 정산 주기를 30일로 축소하면 상품 수가 줄어들어 소비자 선택 폭이 감소하고 지역 내 유통 기업이 1500억 유로 이상 피해를 볼 것이라고 밝혔다.
유 교수는 “정산 단축은 플랫폼의 운영자금 압박으로 이어져 중소 플랫폼부터 시장에서 탈락하기 시작한다”며 “결국 대형 플랫폼만 살아남아 시장집중도가 높아지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산주기를 60일에서 20일로 줄이면 시장집중도가 평균 16.45%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플랫폼 간 양극화 지수도 60일 대비 20일 환경에서 평균 2.4배 높아졌다.
유 교수는 사회적 후생 감소도 경고했다. 정산 단축으로 인한 시장 효율성 저하로 사회적 후생은 약 8% 감소하며,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1년간 최대 19조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입점업체 피해 21조원과 합산하면 총 40조원 규모다.
정산 단축의 피해는 플랫폼 유형에 따라 차등 발생했다. 재고를 보유하는 직매입형 플랫폼은 중개형에 비해 타격이 컸다. 정산주기를 60일에서 20일로 단축하면 직매입형 플랫폼의 주간 거래액 가치는 중개형 대비 13.9% 더 크게 감소했다. 직매입형 플랫폼의 GMV(총거래액) 피해는 연간 약 7조7000억원으로 추정됐다. 중개형과 비교한 피해액 차이는 최대 5조8000억원에 달했다.
토론에 나선 학자들도 신중론을 더했다.
좌장을 맡은 정연승 단국대 경영대학원장은 “정산주기 단축은 플랫폼의 사업 모델, 이커머스 시장 구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며 입법 영향을 다각도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오프라인은 상위 20% 입점업체 매출이 전체 매출을 좌우하지만, 온라인은 절반도 차지하지 못하고 하위 다양한 상품들이 매출을 일으키는데 규제를 도입하면 이들이 먼저 피해를 보게 된다”면서“직매입과 중개형, 재무 능력과 규모를 차등화해 유동성 위기에 대비할 시간을 제공하고 성장 가능성도 보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리적 문제점도 지적됐다.
유정희 벤처기업협회 본부장은 “직매입 플랫폼은 교환ㆍ환불을 고려해 정산주기를 60일로 운영 중인데, 20일로 단축하면 전자상거래법에서 3개월로 명시한 소비자 피해 규제 기간과도 상충되고 플랫폼의 부담이 커질 것”
정신동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산주기를 명시한 기존 대규모 유통업법 8조 역시 최근 대법원에서 단속규정으로 판단했는데, 계약 당사자간 80일로 약정했다면 유효하다는 의미”라며 “입점사업자와 플랫폼간 적용되는 기존 약관규제법을 활용하면 추가 입법 없이도 불공정 행위를 단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구매 철회 기한(90일)보다 정산(60일)이 빠르면 환불 재원을 마련하기 어려워 소비자가 피해를 볼 수 있고, 플랫폼이 여기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카드 할인이나 쿠폰 지급 등을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는 김남근ㆍ오세희ㆍ임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며, 주병기 공정위원장도 지난 9월 간담회에서 “대금 지급기한이 지나치게 길어 거래 안전성이 떨어진다”며 정산 주기 단축 의지를 밝혔다.
문수아 기자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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