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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적이고 詩같은 자동기술 단색화...“지워가며 예술을 뽑아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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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10-23 15:00:39   폰트크기 변경      
송수련 화백, 서울 인사동 가람화랑에서 개인전....‘내적시선’시리즈 30여점 선봬


한국화가 송수련은 어린 시절 참으로 그림이 많이 고팠다. 창문 넘어 먼발치의 풍경을 그려도 보고,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해봤다. 한국과 중국의 문인화 책을 읽으며 틈틈이 화법도 익혔다. 대학 시절 한국화를 전공하며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는 미술을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미술에 대한 끊임없는 수련과 연습으로 색채 드로잉과 한국화도 섭렵했다.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한 처절한 적응 훈련이었다. 30~40대 동서양의 융합을 시도한 그림이 뭘까 고민했다. 결국 정형화 된 틀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의 이치와 우주, 삶의 순간, 아름다운 생각을 한국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추상화에 도전했다. 그 결과 문공부장관상(1978년)과 석주미술상(2004년)을 차례로 수상하며 한국 화단에서의 굳건한 입지를 다졌다. 그렇게 화가로 50년의 긴 시간을 살아온 그를 또 한 번 전시장으로 불러냈다.

송수련 화백이 23일 서울 인사동 가람하랑 초대전에 출품한 신작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가람화랑 제공

지난 22일 서울 인사동 가람화랑에서 개막한 개인전은 송 화백이 화업 반세기를 맞아 자동기술법으로 무의식적인 감성의 실타래를 뽑아내는 특별한 자리다. 경기도 용인 작업실에 파묻혀 죽어라 그림에만 매달려 대차게 꾸린 ‘그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내적 시선’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다채로운 단색으로 화면을 구성한 명상적이고 시적(詩的)인 단색화 30여 점이 걸렸다. 고향 장맛처럼 우러난 색채의 아우라를 늦가을 좋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화가의 마음을 살짝 얹었다.

23일 전시장에서 만난 송 화백은 “전통적인 채색의 물성과 동양화 모필, 가는 실을 활용해 한국적 단색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싶다”고 했다. 색을 머금은 물감과 종이가 만나 이룬 농도, 글쓰기처럼 한 획 한 획의 반복된 필선을 만들어 ‘한국적 단색 언어’를 창조하겠다는 다부진 의지로 읽힌다. 그의 작품은 얇은 한지를 깔고 무수히 반복하는 선으로 캔버스에 물감을 먹이면 뽀얀 색감이 아래로 깊숙이 침투했다가 다시 위로 우러나온다. 물감이 흠뻑 젖은 한지가 마르면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다. 단색으로 칠해진 화면이지만 물감이 스며든 흔적이 화려하고 은은하다. 색감을 밀어 넣어 앞쪽에 드러나게 하는 기법(배채법)을 자유자재로 적용한 것이 이채롭다.

실제로 송 화백은 그린다기보다는 지운다는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 예술을 뽑아낸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지우면서 자연의 흔적으로 남기려는 화법을 자주 활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른바 '지움의 미학'이 여기에서 나온다. 1980년대 단색 추상회화 '관조' 시리즈를 거쳐 2016년대부터 현재까지 화면을 언 듯 보면 낙서 같기도 한 비구상 자유 드로잉 작업 '내적시선' 시리즈를 선보였다.

그의 '내적시선'시리즈에는 지워진 듯한 형상, 푸근하게 감싸는 전통 한지의 물성, 기교를 감춘 듯한 세련된 붓질 등 자연의 본질을 응시하려는 '영혼의 시선'이 담겨 있는 듯하다. 긁힌 자국, 반복되는 점, 식물의 줄기 같은 가녀린 흔적 등은 '시간'과 순환하는 '자연'과의 유기적 관계를 상징한다.

작가는 "경기도 용인 작업실에서 하루 8시간씩 캔버스와 마주하며 숲, 발판, 바람결, 햇살 등의 형상을 마음의 눈으로 지워간다"며 "내 작업은 존재에 대한 지워짐의 '알리바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없애는 게 아니라 '본질'만을 남기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색을 화면에 공들여 바르고 가느다란 실선들로 심성(心性)을 삼투시켜 단색화(모노크롬) 미학을 구현했다는 얘기다.
가람화랑 초대전에 출품한  신작  '내적 시선' 앞에 서  있는 송수련 화백.   사진=가람화랑 제공

마음속에 침전된 이야기를 붓으로 길어 올려 색을 입히고 질감을 내는 데 음악적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역동적인 음악은 꿈틀거리는 색선으로, 현의 떨림은 색면의 형태로 축조한다”는 그의 말이 다부지다. 반복된 필획의 중첩은 작가의 내면이 흘러가는 리듬이자, 동양화의 전통 속에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진화한 ‘드로잉의 언어’인 셈이다. 송 화백은 “색이 있어 형(形)이 되고, 음(音)이 있어 형이 되는 경지를 지워낸 것”이라며 “마음속에 움튼 소망과 희망, 기쁨 같은 걸 포착해 색감으로 삭였다”고 강조했다.

음악을 곁들여서인지 지극한 정성으로 칠하고 매만져 이룬 작품들은 그의 신체, 감정, 간절한 소망 등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처럼 빛난다.

가령 쇼팽의 '파가니니의 추억' 변주곡’을 듣고는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웅장함과 거대함을 채색하고,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통해서는 사랑과 열정의 이미지를 색채로 변주한다. 또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에서는 희망의 의미를 끄집어내고, 비탈리의 ‘샤콘’에서는 생명의 탄생을 색칠한다.

그래서인지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은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배어 나온다. 공간이 조용하면 관람객이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사색적인 요소도 짙게 깔려 있다. 전시 공간의 조명과 어우러지며 서로 ‘만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연스럽게 생명력을 뿜어낸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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