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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공정한 시스템이 곧 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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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10-30 08:50:02   폰트크기 변경      
‘적정 공사비’의 본질은 숫자 아닌 구조

이우연 토펙엔지니어링 전무

정부가 건설근로자의 합리적 임금을 보장하는 ‘적정임금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공사비와 공사기간의 현실화를 의무화한 ‘건설안전특별법’ 제정 논의도 본격화했다. 건설안전의 출발점은 결국 ‘적정 공사비’라는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지만, 정작 ‘적정’의 기준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정부는 재정 건전성을, 시공사는 원가 반영을, 근로자는 생활임금을 내세운다. 그러나 핵심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본질은 공공 건설사업 시스템이 얼마나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설계돼 있느냐에 있다.

국토교통부는 최저가 낙찰 중심의 구조가 ‘저가 투찰→인건비 절감→품질 저하→사고’의 악순환을 낳았다고 진단한다. 실제 건설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제조업의 74% 수준이며, 산업재해율은 두 배 수준이다. 근속연수는 짧고, 임시ㆍ일용직 비율은 높다. 인력 고령화와 외국인 의존도가 심화하면서 2025년 이후 매년 30만명 이상의 인력 부족이 예상된다. 숙련공 이탈과 생산성 저하가 산업 경쟁력의 근본적 약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적정임금제와 공사비 현실화가 대안으로 나온 배경이다. 건설근로자공제회가 실시한 적정임금제 시범사업 현장은 일반 현장 대비 노동생산성이 60% 이상 높고, 근속일수ㆍ내국인 비율도 눈에 띄게 높았다. 임금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생산성과 품질, 고용안정성을 높이는 ‘투자’임이 수치로 입증된 셈이다.

문제는 이를 지탱할 현실적 공사비다. 발주 단계에서 원가가 반영되지 않으면, 원청은 하도급 단가를 낮춰 대응하고, 그 부담은 현장으로 전가된다. 가장 먼저 줄어드는 항목이 노무비와 안전관리비다. ‘건설안전특별법’은 발주자에게 적정 공사비ㆍ공기 산정 책임을 부여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과징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그러나 제도의 실효성을 담보하려면 ‘적정’의 사회적 합의와 검증 체계가 선행돼야 한다. 예산의 한계, 산업의 현실, 노동의 가치가 충돌하는 영역에서 어느 한쪽 논리로는 균형을 세울 수 없다. 균형이 깨지면 결국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이 된다.

‘Management 3.0’의 저자 위르헌 아펄로는 “사람을 탓하지 말고 시스템을 관리하라”고 했다. 한국 건설산업이 직면한 문제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공사비 논쟁은 단순한 숫자의 다툼이 아니라, 예산 편성-설계-시공-유지관리 전 과정의 시스템 설계 문제다. 제도만 바꾸는 1970년대식 ‘상명하복형 관리(Management 1.0)’로는 복잡한 산업 구조를 다룰 수 없다.

발주자, 시공사, 근로자가 상호 신뢰 기반의 공정 시스템을 함께 설계해야 할 때다. AI(인공지능)의 등장은 이미 산업의 의사결정 방식을 바꿔놓았다. 세계는 협력과 피드백을 중시하는 Management 4.0, 즉 AI 기반 판단과 인간의 윤리를 결합한 ‘적응형 리더십 체계’로 이행하고 있다. 공사비 산정의 투명성 또한 전제돼야 한다. AI 기반 원가 데이터와 디지털 검증 체계를 병행하고, 모든 이해관계자가 안전하고 존중받는 구조를 지향해야 한다. 적정 공사비는 금액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공정과 품격의 수준이어야 한다.


이우연 토펙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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