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기획자이자 아트마켓 전문가 김윤섭 예술나눔 공익재단 아이프칠드런(AiF children) 이사장(56)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꿈나무 화가였다. 꼬챙이나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마음 가는 대로 그리거나, 창문 너머 먼발치의 풍경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동국대 미대를 졸업하고 화가가 될까 고민했지만 왠지 언론계가 땡겼다. 현장을 발로 뛰며 미술시장을 훼집고 다녔다. 미술전문지 편집장을 거쳐 편집이사 자리까지 승승장구하며 국내외 아트마켓 트렌드와 메카이즘을 몸소 체득했다. 불철주야 연구도 병행하며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도 땄다.
2010년대 들어서면서 전시 감독 및 미술 평론에도 눈이 갔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를 비롯해 한강조각프로젝트,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등 대형행사에 전시 감독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숙명여대 겸임교수로 출강하면서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운영자문 및 가격평가위원, 서울시 공공미술위원, 서울시 규제혁신자문심사단 위원, 인사혁신처 면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젠 국내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전시기획과 미술행정 전문가 대열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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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나눔 공익재단 ' 아이프칠드런' 을 3년째 운영하고 있는 아트마켓 전문가 김윤섭 이사장 . 사진=아이프칠드런 제공 |
메머드급 전시 기획부터 예술나눔이란 사회공헌 활동까지 다부지게 실천해 온 김 이사장을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얼굴에서 풍기는 영험한 공기는 영락없는 아티스트의 모습지만, 지극히 나지막하게 조용한 거동에서 가슴에 많은 사연이 담겨 있음을 짐작게 했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종교적 신념의 수행자적 인상도 풍겨온다. 개인의 욕심을 뒤로하고 이타적인 삶의 가치를 좇는 실천주의적 삶을 선택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론을 실천하며 마치 수행하듯 살아가는 그는 “평생 진정한 예술은 창조적인 아티스트의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의해 오롯이 탄생하지만, 위대한 예술은 결국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며, “모든 사람에게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게 예술의 본질이고 궁극적 목표라 믿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비바람이 치거나 폭설이 내리면 종종 미술관을 찾는다. 폭풍에 바닷물이 뒤집히는 그림도 좋고, 눈 쌓인 해변에 찰랑거리는 사진도 챙겨본다. 미술 중심의 삶을 일구면서 살아온 부침의 세월도 그랬다. 사업이 잘 안풀리고, 시장이 힘들어도 머릿속에 미술의 신념을 품고 파도처럼 견뎠다.
어느 날 미술의 사회적 공유에 대한 활로를 모색하는 아이템들이 렌즈에 이슬 맺히듯 그에게 다가왔다. ‘나눔과 미술은 더 이상 둘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예술나눔은 50대 중반을 넘어선 그에게 미술 인생의 조미료 같은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전시기획과 미술 비평 및 시장 전문가가 예술나눔 공익재단법인 ‘아이프칠드런’을 3년째 운영하는 이유가 더욱 궁금했다.
“미래세대를 위한 예술나눔 아트플랫폼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예술이 우리 사회의 미래에 어떤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란 답이 돌아왔다. 예술인의 창조적인 작품을 보여주면서 미래세대 청소년에게 새로운 자존감을 불러일으키고, 감성적 힐링을 제공해 스스로 미래 비전을 찾아가도록 안내해 준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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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프칠드런은 국내 예술인으로 구성된 문화구호활동 팀을 꾸려 2024~2025년 연속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예술나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사진=아이프칠드런 제공 |
아이프칠드런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2022년 출범하면서 대한적십자사와 업무협약(MOU)도 체결했다. 공감의 결을 함께 하는 다른 공공기관이나 기업들과 협력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경기도교육청과 문화소외지역 청소년들에게 ‘AI를 접목한 미술교육’을 제공했다. 지난 7월에는 예술인 15명으로 예술나눔 팀을 꾸려 탄자니아로 문화구호 활동을 다녀오기도 했다.
“미술 현장에서 30여 년간 맺어온 다양한 분야의 많은 인연 덕분입니다. 단지 시기적으로 필요로 하는 행사의 성격에 맞춰 의뢰자와 수요자 간의 상호 만족도와 부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방안을 먼저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은 아트마켓 전문가답게 최근 국내 미술시장 상황에 대해서도 마치 바둑을 계가하듯 술술 풀어냈다. 인류의 역사에서 미술과 경제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한 그는 먼저 입을 열었다.
“미술이 융성한 시기는 늘 경제적 번영기와 일치하며 수많은 명작은 번영의 자양분을 먹고 탄생합니다. 그러나 최근 국내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아요. 지구촌 미술시장의 전반적인 호황에도 국내 미술시장은 허약 체질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미술은 시장 메커니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기 때문에 경제학적 접근이 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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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프칠드런은 지난 2023년 11월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튀르키예 지진피해지역에 예술나눔 문화구호 활동을 다녀왔다. 사진=아이프칠드런 제공 |
“그림은 인간이나 사회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경제 현상이 그대로 투영됩니다. 호황 때는 사치, 정략결혼, 부동산 투기 같은 것들이 테마로 다뤄지는 게 그 증거죠. 반면에 불경기에는 핵심적인 것보다 미술시장 같은 주변부의 것들이 더 큰 영향을 받아요.”
그는 국내 미술계 침체의 원인과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 둔 ‘현장 지식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문화시장이 탄탄해지려면 소득 수준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주제에 가장 먼저 방점을 찍었다.
“이제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겨우 넘었으니 아직은 걸음마 단계죠. 미술시장을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도 호의적이지 않고요. 설상가상으로 미디어에도 미술과 관련한 부정적인 사례만 비춰져 사람들이 미술품을 공개적으로 거래하길 꺼리는 예가 많습니다. 시장의 음성화를 부추길 수밖에 없죠.”
그는 “정부가 주택경기가 안 좋으면 다양한 부양책을 내놓는 것처럼, 미술계에도 지속 가능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라는 얘기도 놓치지 않았다.
“미술시장 경기가 다운될 때는 양도소득세를 한시적으로 유보하거나 기업의 미술품 구매 등에 세제 혜택을 적극적으로 부여해 영세한 화랑의 손실분을 메워주는 현실적 대안이 중요합니다. 그나마 ‘미술품 물납제’가 2023년부터 시행된 것은 다행입니다. 상속세 납부세액이 상속재산의 금융재산가액 보다 크고, 그 규모가 2000만원을 초과할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못을 받았지만, 기업들의 미술 투자가 시작되면 한국 미술시장은 본격적으로 커지게 될 겁니다.”
김 이사장은 “우리나라 미술시장이 커지려면 기업이 나서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술시장에서 기업은 일종의 기관투자가입니다. 기업들이 미술에 미치는 영향이 큰데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 일본 등 선진국과 달리 미술 투자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미술품이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고 마케팅 투자나 자산관리 측면에서 얼마나 유용한지에 대한 인식이 덜 된 탓이지요. 기업이 현재 그림을 구입할 경우 회사 장식품 명목으로 최대 1000만원까지 손비를 인정해 줍니다. 미술품을 소장하는 것은 문화를 사는 것이니, 손비 인정 범위를 기본 2000~3000만원까진 확대하는 것이 현실적인 실효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국내 미술시장 규모가 너무 작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컬렉터 숫자가 적어요. 전체 시장의 노출된 연간 거래 규모도 겨우 5000억원 수준이고요. 미술품이 지난해 경매에서 거래된 게 고작 1500억원 밖에 안 됐어요. 중국은 미술시장 형성의 역사는 짧지만 연간 거래 규모만도 최소 3조~4조원에 달하고, 컬렉터도 수천만 명에 달할 정도로 저변이 두텁습니다. 꼭 중국이 아니더라도 일본이나 비슷한 경제 규모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우리나라 수준이 현격히 낮은 수준일 겁니다.”
그는 미술시장 회복을 위해 이재명 정부의 최우선 과제에 대해선 “우선 스타급 작가를 육성해야 한다”라고 강한 어조로 밝혔다.
“스타급 작가를 육성하려면 먼저 문화시장이 형성돼야 합니다. 일정 수준에 오르도록 정부가 발 벗고 나서 ‘문화의 사회화’에 기여해야 합니다. 작가를 제대로 지원할 생태계 기반 마련을 위해 화랑이나 기획자(사) 등 1차 시장 지원에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사실 한국에는 백남준 이후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을 대표할 만한 브랜드 작가가 거의 없다. 최근 단색화가 국제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K-팝이나, K-푸드처럼 활성화 및 지속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구조적인 문제가 얽혀있다. 국공립 미술관에서는 특정 작가의 개인전보다 블록버스터 전시나 기획전이 우선시 된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하기 때문에 특정인의 개인전을 열 경우 엄청난 민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상업화랑 쪽에서도 스타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화랑이 화가의 역량과 경쟁력을 어느 정도 높여 놓으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기 일쑤이다. 화랑들은 부득불 그냥 해외에서 ‘뜨고 있는 작가’를 들여와 장사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컬렉터가 없는 것도 문제다. 국내 최대 미술계 ‘큰 손’으로 삼성 등 몇 명 기업이었지만, 최근에는 그마저도 미술품 구입에 소극적이다. 그림 수집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풍토가 빨리 개선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김 이사장은 앞으로의 미술시장 분위기에 대해서는 낙관론을 폈다.
“경제 상황에 따라 조정이 다소 지연될 수 있지만 침체가 장기화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문화투자 시대가 열리는 만큼 최근 미술시장의 분위기는 앞으로 1~2년 내 호전될 전환기를 맞을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그는 “21세기는 문화가 경제의 새로운 동력이 되는 시대인 만큼 문화장터인 미술시장을 잘 키우는 게 중요하다”라고 했다.
“미술품 투자는 개인의 수익뿐만 아니라 국가 문화경쟁력을 증진하는 요소지요. 작가들이 도약할 수 있도록 길 위에 아스팔트를 깔아주는 역할이 주요합니다.”
김 이사장은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서 미술사업이 유용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라며, “예술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기획자는 화랑과 화가, 컬렉터와 함께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바퀴 같은 존재입니다.”
최근 미술의 사회적 공유와 활로 모색에 대한 의견도 내놓았다.
“언론에서 이건희컬렉션 사례처럼, 미술품 기증 같은 선행 기사를 많이 소개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미술관의 공통점은 부유층의 소장품 기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죠. 아마도 이건희컬렉션을 국립현대미술관이 세금으로 구입하려면 300년도 넘게 걸렸을 겁니다. 화랑도 판매 기록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작가는 활동 역량에 맞게 적정한 가격으로 작품을 선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발전적인 시장 풍토가 먼저 형성될 수 있고요. 이런 노력이 있어야 행정 당국도 설득할 수 있겠죠. 부정한 축재와 미래 가치를 보고 그림에 투자하는 행위는 구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죠. 제각각의 구성원 성격에 맞는 노력을 합쳐야만 ‘예술이 우리의 내일을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과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예술 나눔에 대한 확고한 소신은 마치 태초의 빛처럼 퍼져 나갔다. “예술은 누가 뭐라해도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주는 마술 같은 것이지요.” 허허로운 그의 말 한마디가 법어처럼 뭉클하게 울렸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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