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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산업은 철강·시멘트·기계·통신·물류 등 다양한 산업이 맞물린 복합 생태계다. 관세 체계나 무역 규범이 바뀌면 자재 조달 구조와 원가, 기술 협력, 해외시장 전략이 동시에 변한다. 이번 한·미 협상은 건설 자재와 기계 장비의 가격 변동을 넘어 산업 전반의 구조적 재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건설업계는 이를 단순한 통상 뉴스가 아닌 ‘변화의 신호’로 읽어야 한다.
관세 조정은 건설 자재 공급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 건설산업은 철강재·특수강판·기계부품 등 핵심 기자재를 상당 부분 해외에서 조달하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 기준 형강·봉강의 수입 의존도는 약 23% 수준으로 추정된다(한국철강협회 자료). 미국과 유럽산 고급 기계·장비 비중도 높아 관세 인하는 단기적으로 원가 안정에 도움이 되겠지만, 비관세 장벽이나 물류비 상승이 겹치면 오히려 프로젝트 원가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이제 조달체계는 가격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급망 리스크 분산, 국내 생산기반 강화, 수입선 다변화를 통해 탄력적 조달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는 비용 절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인프라의 회복력(Resilience)을 높이는 과제다. 건설산업의 경쟁력은 효율성보다 안정성, 단가보다 지속가능성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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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플레이션감축법(IRA, Inflation Reduction Act)’은 2022년 8월 제정된 미국의 기후·에너지·세제 종합법으로, 향후 10년간 약 3,690억 달러를 투입해 탄소배출 감축, 재생에너지 확대, 전기차 보급, 청정기술 산업 육성을 추진한다. 동시에 법인세 개혁과 재정적자 축소를 목표로 하는 미국의 대표적 녹색 산업전환 전략이다. (사진 출처: 미국 에너지부(U.S. Department of Energy) 홈페이지, 「Investing in American Energy Report」 표지 이미지) |
이번 협상은 한국 건설기업의 해외 진출 구조에도 변화를 예고한다. 미국은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법(IIJA)’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향후 10년간 약 1.6조 달러 규모의 공공 및 청정에너지 인프라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관세 인하와 투자 협력이 본격화되면 한국 건설사의 미국 시장 진출 기회가 한층 넓어질 것이다. 이미 대형 건설사들이 배터리 플랜트와 친환경 발전소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삼성 E&A의 인디애나주 저탄소 암모니아 플랜트(약 4억 7500만 달러) 수주는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흐름은 중견·중소 건설기업으로도 확산돼 플랜트 기자재와 엔지니어링 분야의 새로운 협력 기회를 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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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자동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은 2023년 하반기 미국 조지아주 브라이언카운티에서 착공한 배터리 셀 공장을 공동 건설 중이다. 총 43억 달러를 투자해 2025년 말 가동을 목표로 하며, 연 30GWh 규모로 전기차 30만대 이상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북미 전기차 공급망의 핵심 거점이다. (사진 출처 : HL-GA Battery Company 홈페이지) |
그러나 미국 시장은 기술력만으로 진입이 쉽지 않다. 복잡한 환경·노동 규정과 안전 기준, 그리고 현지화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면 수주 경쟁력은 약화된다. 관세 혜택에 기대기보다 법규 이해, 금융조달, 프로젝트 관리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기술의 수출을 넘어 시스템 수출로 확장하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이번 협상은 또한 기술 표준 경쟁의 새로운 국면을 연다. 한·미 협력의 축은 이제 물류 중심의 교역에서 데이터와 기술 중심의 디지털 협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은 인프라 설계와 시공 전 과정에 디지털 트윈과 BIM을 의무화하고, AI 기반 공정관리 기술을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한국 건설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디지털 건설·탄소중립 인프라·스마트 안전관리 분야에서 표준을 선도하는 전략적 전환이 필요하다.
정부 역시 통상협상 과정에서 건설산업의 기술 규제와 표준 문제를 부속 이슈가 아닌 핵심 수출 과제로 다뤄야 한다.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대, 건설은 제조·도시·에너지·기후를 잇는 플랫폼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변화는 피할 수 없지만, 방향은 선택할 수 있다”는 이 말은 피터 드러커의 경영철학을 잘 보여준다. 이번 한·미 통상협상은 그 ‘방향의 선택’을 우리 산업에 요구하고 있다. 건설산업은 공급망 재편과 기술 경쟁의 한가운데서, 위기를 관리하는 산업이 아니라 변화를 설계하는 산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속도의 경쟁이 아닌 방향의 리더십, 그 리더십의 주체로 한국 건설산업이 나서야 할 때다.
김형렬 연세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 객원교수(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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