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 예술은 철저히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 때론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작업실에 갇혀 외로움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거든요. 고독한 작업이지만 관람객이 제 작품을 보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이 험난한 길을 죽는 날까지 계속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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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 조각 작업을 하고 있는 고정수 씨. 사진=갤러리 아트릭트 제공 |
11일 서울 반포동 갤러리 아트릭트에서 '여체와 곰'을 테마로 달고 개인전을 시작한 고정수 씨(78·사진)의 말이다. 그는 사실적 여체 조각의 개척자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뒤 60여년간 고대 불상과 인체미학을 결합해 한국적인 여성상을 형상화해 왔다. 1981년 국전에서 대상을 받은 그는 금호예술상(1985년), 선미술상(1986년), 문신미술상(2013년)을 잇달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고달픈 삶 속에서도 조각가로서 자긍심을 잃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는 아무나 접근하기 어려운 ‘유별난 세계’라는 확신이 든다”고 설명했다.
고씨는 조각여정 60년을 아우르는 이번 전시에 조형물과 브론즈를 비롯해 곰 조형물, 알루미늄 래핑, 테라코타, 세라믹, 한지부조 등 푸짐한 ‘예술 보따리’ 50여점을 풀어놓았다. 전시는 내년 2월말까지 3개월여에 걸쳐 갤러리 실내 공간과 야외 정원에서 1부(11월11일~12월31일)와 2부(2026년 1월 1일~2월 28일)로 나누어 진행된다.
누가 무래도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역시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의인화된 곰 조각이다. 전시장에는 곰을 의인화해 사람들의 행복을 형상화한 작품 '밝은 세상', '반달곰 태권도 하다', '말뚝박기 놀이-1', '잊혀져 가는 유희' 등이 관람객을 반긴다.
고씨는 “가끔 ‘여체를 조각하다가 웬 곰이냐’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지만 예술 작품은 작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행복과 감동을 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그는 고단한 현대인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이미지를 찾고자 무던히도 애썼다. 10년간 곰 조각에 매달려온 이유다. 예술은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곰 조각을 시작했다는 그에게 이제 곰은 단순한 모티브가 아니라 주제이며, 조각 인생 제2막의 새로운 생명줄이 됐다.
| 야외에 전시된 고정수 씨의 여체 조각들. 사진=갤러리 아트릭트 제공 |
곰의 미세한 움직임을 잡아내기 위해 애쓰는 고씨는 관람객의 미소를 떠올리며 그동안 숨겨뒀던 손재주를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작품 형태 역시 공공 조형물을 비롯해 부조, 테라코타 등 다양하게 제작해 관람객과의 친근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동물학자처럼 곰의 생태를 연구하고, 곰의 다채로운 이미지를 사진으로 찍어 조각에 적용하고 있다.
선이 굵고 탄탄한 곰 조각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에는 우리의 모습처럼 귀여울 뿐만 아니라 위안과 힐링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트’를 머리 위로 그리는 곰, 말뚝박기 놀이를 하는 곰, ‘사이좋게 지내자’며 딸을 안아주는 엄마 곰, 꿀단지를 안고 꿀을 먹는 곰 등 보기만 해도 익살스럽고 평화롭다. 그동안 작업했던 여체의 미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가 깎아내 혼을 불어넣은 곰 조각은 편안하면서도 푸근해 가족애와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
선이 굵고 탄탄한 여체 조각들도 눈길을 붙잡는다. 그에게 여체는 단순히 작업의 모티브가 아니라 수행의 수단이다. 돌과 브론즈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한국적 여성상을 여지없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여성’ ‘고향’ ‘어머니’에 대한 의미를 따뜻함, 푸근함으로 치환하는 그의 손재주와 아이디어가 놀랍다. 서구적인 8등신이 아니라 5~6등신의 비례를 고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여성 누드상들은 독특한 미감 뿐만아니라 특유의 생명감, 소박함까지 풍겨난다. 다이어트 열풍에 반기라도 들듯 허벅지와 엉덩이 부분은 늘 터질듯 풍만하다. 표정도 때론 환호하는 등 감정이 직접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조용하고 사색적이다.
최근 작업한 테라코타, 세라믹, 알루미늄 랩핑,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 사진 작품 등도 색다른 볼거리다. 호랑이, 다람쥐, 뱀을 세라믹 접시 형태로 조형화한 게 이채롭다. 마치 아즈텍이나 마야문명의 유물처럼 강하고도 싱싱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또 3차원 입체 작품을 평면예술로 구현한 사진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미학으로 재탄생했다. 연출이나 조명 같은 촬영 테크닉보다는 피사체의 결정적인 순간과 영혼을 포착하는 데 주력했다. 빛과 그림자가 기하학적 대비를 이룬 빼어난 구도의 사진들은 오묘한 미감을 전한다.
예술의 대중화를 추구하고 싶다는 고씨는 “제 작품을 보면서 관람객들이 잠깐이라도 고뇌에서 벗어나 웃을 수 있다면 제 소임은 끝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품세계와 그 가치를 지키는 것은 오직 나뿐일 것”이라며 “찾는 이가 없어 고독하다면 그 역시 숙명”이라고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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