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막으면 법적 대응” 예고
20년간 착공 못 해 누적 채무 7200억
종로구 “서울시 입장에 뜻 같이해”
오세훈 “종묘가 오히려 수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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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일 세운4구역 주민 기자회견. / 사진 : 연합 |
[대한경제=박호수 기자] “20년을 기다렸는데 또 멈춘다니...”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다시세운광장에 모인 세운4구역 주민 100여 명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들은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라’, ‘정치적 이용 중단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대법원이 서울시의 조례 개정을 적법하다고 판결하며 재개발에 숨통이 트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정부와 서울시의 충돌로 다시 제동이 걸리자 주민들이 거리로 나온 것이다.
이날 세운4구역 주민대표회의는 “2009년 세입자를 모두 내보내고 월세 수입도 끊겼다. 매달 20억원씩 금융비용만 나가며 누적 채무가 7250억원에 달한다”고 호소했다. 한 주민은 “대법원 판결이 나도 또 막히니 이제는 희망이 없다. 문화재를 지키는 건 좋지만, 우리 재산은 누가 지켜주느냐”고 말했다.
관할 지자체인 종로구도 서울시의 입장에 힘을 실었다. 정문헌 종로구청장은 12일 “서울시 입장에 뜻을 같이한다”며 “이 사업은 종묘의 가치와 정체성을 지키면서 종로의 역사성과 도시미관을 함께 살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종묘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역사문화경관의 녹지 축을 조성해 조화로운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게 본질”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세운4구역의 건물 높이 제한을 종로변 55m에서 101m, 청계천변 71.9m에서 145m로 완화하는 재정비계획을 고시했다. 그러나 지난 10일 김민석 국무총리가 “종묘 앞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눈을 가리고 숨을 막히게 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논란이 다시 커졌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관련 법을 개정해서라도 막겠다”고 했다.
이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한 라디오에 출연해 “500m 떨어진 곳에 100층, 150층을 짓는 것도 아닌데 ‘숨이 막힌다’, ‘기가 눌린다’는 건 감정적인 주장”이라며 반박했다. 그는 “세운상가를 허물고 녹지를 만들면 최대 수혜자는 종묘”라며 “수십 년째 방치된 1~2층 판자촌 같은 일대를 더는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세운4구역이 종묘 담장으로부터 173~199m 떨어져 있어 세계유산영향평가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전에서 바라보면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조만간 시뮬레이션 결과를 공개하고, 유네스코에 직접 설명자료를 제출하겠다는 입장이다.
세운4구역 주민들이 이렇게 거리로 나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재개발 추진이 시작됐지만, 매번 문화재 심의에 막혔다. 한 주민은 “15년 동안 시장은 바뀌는데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서 발이 묶여 있었다”고 말했다.
이 논쟁의 뿌리는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명박 정부 당시 서울시는 세운상가 부지에 높이 122m의 고층 건물을 세우려 했지만, 문화재청은 “종묘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해친다”며 ‘보류’ 결정을 내렸다. 이후 건물 높이는 50m 수준으로 낮아졌고 사업성은 사라졌다. 박원순 전 시장은 세운상가 철거 계획을 백지화하고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주민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SH공사는 장기간 금융비용으로 2000억원대 손실을 봤다.
2021년 오세훈 시장이 복귀하면서 흐름은 바뀌었다. 그는 “세운상가 위에 올라가 종로2가와 청계천을 보며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하며 세운상가 철거를 재천명했다. ‘녹지생태도심 재창조 전략’을 발표해 세운상가를 허물고 남산까지 녹지축을 잇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주변 재개발로 생기는 이익 1조5000억원으로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구상도 포함됐다.
서울시는 이번 개발이 “도심 재생과 문화유산 보존이 공존하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중앙정부는 “세계유산 가치 훼손은 되돌릴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양측의 대립이 길어질수록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세운4구역 주민들은 “20년 넘게 재개발을 기다렸지만, 정치 논쟁 속에 또 멈춰 섰다”며 “이제는 더 버틸 여력이 없다”고 토로한다. 도심 한복판의 낡은 건물 사이로 세월만 쌓이는 가운데, 서울시와 정부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가 재개발의 향방을 가를 전망이다.
박호수 기자 lake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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