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협약 조항 삭제ㆍ재무 검증 부실
“현행법상 실질적 구제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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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13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열린 국토교통부 국정감사에 전세사기로 헬스장을 폐업한 헬스트레이너 겸 방송인 양치승 씨가 참고인으로 출석해 자리에 앉아 있다. / 사진: 연합뉴스 |
[대한경제=박호수 기자] 서울시가 기부채납 공공시설에서 발생한 임차인 피해를 막기 위해 민간투자 건축물대장에 ‘기부채납 관리운영 기간’을 의무 기재하는 개선안을 내놨지만, 이미 보증금과 시설비를 잃고 폐업ㆍ고발까지 겪은 기존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는 여전히 막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핵심은 기부채납 공공시설에서 발생한 ‘임차인 보호 공백’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명 헬스트레이너 양치승씨 사건이다. 양씨는 2019년 강남구 논현동 공공부지 위 민간 개발 건물에 보증금 3억5000만원, 월세 1800만원으로 입점해 수억원을 들여 리모델링까지 진행했다. 임대인은 “10년, 20년 오래 해서 돈 많이 벌라”고 말했지만, 건물이 ‘20년 무상 사용 후 강남구청에 귀속되는 기부채납 공공시설’이라는 사실은 임대차 계약 과정에서 전혀 안내받지 못했다는 게 양씨의 주장이다.
사용기간 20년이 만료된 2022년 관리ㆍ운영권이 강남구청으로 넘어가면서 양씨의 임대차 계약은 그대로 효력을 잃었다. 양씨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고, 강남구청으로부터 공공재산 ‘무단 점유’ 혐의로 고발당해 변상금 5800만원까지 떠안아야 할 처지다. 같은 건물 내 자영업자 15곳이 비슷한 피해를 입어 전체 피해액은 40억원 규모로 치솟았다. 피해자 상당수는 생업을 접거나 부채를 떠안은 채 일터를 잃었다. 피해자들은 “생활 전선에서 쫓겨나 빚더미에 앉아 있는데, 주무관청 모두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고 토로하는 상황이다.
법원도 양씨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최근 대법원은 강남구가 양씨를 상대로 제기한 건물 인도 소송에서 “양씨가 강남구에 헬스장이 위치한 건물의 지하 1층과 2층을 인도하라”는 2심 판결을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구조적 공백 뒤에 강남구의 행정 부실이 겹쳐 있었다는 점이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인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의원실에 따르면, 강남구는 2002년 최초 실시협약서에 포함돼 있던 ‘임대차 계약은 구청과 협의해야 하며, 무상사용 종료와 동시에 임차인 권리가 소멸됨을 명시해야 한다’는 조항을 2003년, 2007년 협약 갱신 과정에서 잇따라 삭제했다. 이 조항이 유지됐다면 임차인이 사전에 기부채납 전환 시점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조항 삭제로 결과적으로 임차인 보호 장치가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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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양치승 씨 개인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MBC ‘실화탐사대’ 못다한 이야기, 강남구청의 실태’ 영상 화면. / 사진: ‘양치승의 막튜브’ 캡처 |
재무 검증 절차도 사실상 비어 있었다. 초기 사업자인 ‘열성종합건설’에서 ‘웰파킹개발’로 운영권이 넘어갈 당시 강남구는 신용ㆍ납세ㆍ재무 적격성 심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위 의원실에 따르면 웰파킹의 최근 잔여재산은 2000만원 수준으로 사실상 보증금 반환 능력이 없었다. 양씨는 “그 사실을 알았다면 계약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재무상태 확인 없이 운영권을 넘긴 것은 행정기관의 명백한 직무태만”이라고 말했다.
강남구는 뒤늦게 기획재정부에 ‘임차인 사전고지 의무화, 보증보험 가입ㆍ사업시행자 재무상태 제출 의무화’ 등을 포함한 제도 개선안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는 ‘사후약방문(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약을 구한다는 뜻)’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구 관계자는 “현재는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변상금 부과만 유예하고 있다”며 구체적 구제 방안은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서울시는 이번 사건이 자치구 소관이라는 점을 이유로 개별 피해 구제에는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비슷한 피해를 막기 위한 제도 보완에는 속도를 내고 있다. 시는 민간투자 공공시설 건축물대장 ‘그 밖의 기재사항’란에 기부채납으로 인한 관리운영 기간 등 핵심 정보를 기재하도록 하고, 25개 자치구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는 권고 사항일 뿐 강제 의무는 아니다. 시 관계자는 “자치구에 지속적으로 권고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 같은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국회에서는 이른바 ‘양치승 3법’도 논의 중이다. 법안은 △기부채납 예정일을 등기부에 의무 기재 △사업시행자 재무상태 검증 의무화 △임차인 사전고지 제도 법제화 등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아직 발의 단계에 머물러 있어 실제 법 개정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한 법률 전문가는 “민간투자사업 특성상 사업자가 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 없으면 임차인은 사실상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는 구조”라며 “양씨 사건은 특정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전국 어디서든 반복될 수 있는 제도적 공백”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양씨는 지난 9월 국민동의청원에 ‘기부채납 공공시설 임차인 보호’를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해 1만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 그는 청원에서 퇴거 임차인을 위한 임시 영업공간 우선 배정, 대체 지원 제도 마련, 퇴거 명령에 대한 외부 검토 절차 도입, 필수 정보 미고지 시 계약 갱신권ㆍ퇴거 유예권을 보장하는 보호 규정 신설 등을 제안하며 “전국에서 유사 피해가 반복되고 있다”며 법 개정을 촉구했다.
박호수 기자 lake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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