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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노트] 결핵 치료의 혁명을 가져온 ‘기적의 약’, 스트렙토마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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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12-24 05:00:20   폰트크기 변경      
죽음의 병, 결핵과의 긴 싸움

[대한경제=김호윤 기자] 20세기 초반까지 결핵은 ‘백색 페스트’로 불리며 전 세계적으로 매년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프란츠 카프카, 프레데릭 쇼팽 같은 예술가들도 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결핵 진단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19세기 말 로베르트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했지만, 효과적인 치료제는 없었다. 환자들은 요양소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폐를 인위적으로 허탈시키는 인공기흉술, 늑골을 제거하는 흉곽성형술 같은 위험한 외과적 시술을 받아야 했다. 대부분은 회복되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갔다.

1943년 미국 럿거스 대학의 셀만 왁스만 교수와 대학원생 앨버트 샤츠는 토양 속 방선균에서 결핵균을 죽이는 물질을 추출했다. 이것이 바로 스트렙토마이신이다.

왁스만은 평생 토양 미생물을 연구해온 학자였다. 그는 병원균들이 토양에 들어가면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고, 토양 미생물이 다른 세균을 억제하는 물질을 생산한다고 가설을 세웠다. 연구팀은 1만 종이 넘는 토양 미생물을 체계적으로 조사했고, 그 결과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샤츠가 분리한 방선균이 생산하는 물질을 결핵균에 시험한 결과, 놀랍게도 균의 성장을 완전히 억제했다. 페니실린이 결핵균에 효과가 없었던 것과 달리, 스트렙토마이신은 결핵균의 독특한 왁스 같은 세포벽 구조를 뚫을 수 있었다.

1944년 11월, 미네소타의 요양소에서 첫 임상시험이 시작됐다. 중증 폐결핵 환자였던 패트리샤 토마스가 첫 번째 환자였다. 메이요 클리닉의 코윈 힌쇼 박사가 담당한 치료에서, 그녀는 스트렙토마이신 투여 후 몇 주 만에 극적인 호전을 보였다.

1947년 영국에서는 의학사상 최초의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이 시작됐다. 오스틴 브래드포드 힐이 설계한 이 시험에서, 스트렙토마이신 투여군의 6개월 후 사망률은 7%에 그쳤지만, 대조군은 27%에 달했다. 이 결과는 의학계에 충격을 줬다. 수천 년간 인류를 괴롭혀온 결핵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1952년 셀만 왁스만은 스트렙토마이신 발견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하지만 실제로 스트렙토마이신을 처음 분리하고 결핵균에 대한 효과를 확인한 것은 앨버트 샤츠였다.

샤츠는 1950년 왁스만과 럿거스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정 공방 끝에 공동 발견자로 인정받았지만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과학계에서 공로 배분 문제를 둘러싼 오랜 논쟁을 남겼다.

스트렙토마이신은 기적의 약이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단독 요법으로 사용했을 때 결핵균은 몇 달 만에 내성을 획득했다. 또한 청력 손실과 균형감각 장애를 일으키는 이독성, 신장 기능 손상을 초래하는 신독성 같은 부작용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학계는 병용 요법을 개발했다. 1952년 아이소니아지드, 1960년대 리팜피신 같은 새로운 항결핵제가 등장하면서, 여러 약물을 동시에 사용하는 방법이 표준 치료법이 됐다.

스트렙토마이신의 발견은 페니실린에 이어 항생제 시대를 본격화했다. 왁스만의 토양 미생물 탐색 방법론은 이후 항생제 개발의 모델이 됐다. 1950-1960년대는 '항생제 황금기'로 불리며, 테트라사이클린, 에리스로마이신, 반코마이신 등 수많은 항생제들이 발견됐다.

오늘날 스트렙토마이신은 다제내성 결핵 치료에서 2차 약물로 사용되며, WHO 필수 의약품 목록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항생제 내성은 전 세계적인 보건 위기로 대두되고 있다. WHO는 매년 약 50만 명이 다제내성 결핵에 감염된다고 보고한다.

80년 전 토양 속에서 발견된 스트렙토마이신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고, 현대 의학의 지평을 넓혔다. 내성균과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항생제 개발과 함께 항생제의 신중한 사용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스트렙토마이신의 유산은 과학적 탐구와 끈기가 어떻게 인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김호윤 기자 khy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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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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