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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속 빈 강정이 된 원전 강국, 안방마님이 바뀔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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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12-23 12:44:05   폰트크기 변경      

“외국 사모펀드나 기업에 팔려나가는 국내 알짜 원전 기업들이 늘고 있습니다.”


최근 원전 기업인 모임에서 들은 이 말은 큰 충격이었다. 밖에서는 K-원전이 세계 최고라며 박수를 받는데, 정작 안방을 지키는 우리 기업들은 남의 손에 하나둘 넘어가고 있던 것이다.

글로벌 원전 시장의 부활이 역설적으로 우리 기업들을 위협하고 있다. 기후 위기와 AI 대응을 위해 세계적으로 원전 수요가 폭증하자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우리 원전 기업들이 매력적인 사냥감이 된 것이다. 특히 미국 시장 진출을 노리는 중국 등 외국 자본에 한국 기업은 유용한 ‘세탁공장’ 역할을 한다. 한국 기업의 간판을 달면 까다로운 견제를 피해 미국 원전 공급망에 손쉽게 올라탈 수 있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우리 기업이지만 알맹이는 외국 자본인 ‘무늬만 국산’ 기업들이 소리 없이 늘고 있다.

국내 원전 산업의 허리인 중소기업들이 고사 위기에 몰린 것이 근본 원인이다. 2023년 원자력산업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원자력 분야 연 매출 10억 원 이하인 기업이 조사 대상의 77%에 달한다. 이는 우리 원전 산업 생태계가 사실상 영세한 중소기업들의 어깨 위에 세워져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기업과 달리 이들 중소기업은 국내 일감이 조금만 끊겨도 단 몇 달을 버티기 힘들다.

정치적 논쟁과 행정적 절차로 인한 사업 지연은 중소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최근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확정된 신규 원전 건설 여부를 두고 다시 토론회를 연다고 하며, 기존 원전의 계속운전 결정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정책 방향이 확정되지 않으니 신규 건설이나 계속운전 사업계획도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가 생존 전쟁인 중소기업에게 정책의 불확실성은 사형선고 예고장이나 다름없다.

현장의 해묵은 관행과 보신주의는 기술 혁신의 의지마저 꺾고 있다. 중소기업들이 어렵게 외국산 못지않은 성능의 기자재를 국산화해도 정작 원전 현장에서는 외면받기 일쑤다. 혹여나 국산 제품을 썼다가 원전이 불시 정지라도 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두려움에 담당자들은 값비싼 외국산 기성품을 고집한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판로가 막혀 있는데 어느 기업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연구에 매진하겠는가.

우리 원전 기업들이 문을 닫거나 외국으로 넘어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가적 재앙으로 돌아온다. 생태계가 무너지면 정작 우리 원전이 적기에 교체 부품과 서비스를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결국 외국 기업에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치러야 하거나 기술적 종속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우리 원전의 안전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발전 단가를 높이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원전 산업 생태계가 튼튼해야 원전을 반도체나 조선 같은 국가 대표 수출 산업으로 키울 수 있다. 탄탄한 국내 공급망은 해외 수주전에서 우리 원전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핵심 자산이다. 세계 시장에서 K-원전이 지속해서 승전보를 울리고 국가 경제를 견인하기 위해서는 뿌리가 깊고 튼튼한 생태계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제도적 개선을 통해 국내 기업들이 계속 사업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줘야 한다. 원전 안전과 직접 관련이 없으면서 정부 인증을 받은 부품부터 우선 사용하도록 법적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중소기업제품 구매촉진 및 판로지원에 관한 법률’의 취지를 원전 현장에 적극 반영하고, 국산 부품을 선택한 담당자에게 과감한 면책 특권을 부여해야 한다. 단순한 현금 지원을 넘어 기업이 스스로 기술력을 쌓고 돈을 지속적으로 벌 수 있는 시장 구조를 만들어주는 것이 급선무다.

결국 튼튼한 공급망이 갖춰져야 우리 원전의 안전도 지키고 경제도 살릴 수 있다. 우리 기업이 무너지면 부품 하나를 갈려 해도 외국 자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안방마님이 바뀌고 난 뒤에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우리 원전 산업의 박힌 돌들이 단단히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국가적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굴러온 돌에 안방을 내어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문주현 단국대학교 에너지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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