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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곳이 권력이다”…OTT, 한국의 ‘공간 가치’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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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12-23 14:41:52   폰트크기 변경      
“K-콘텐츠를 본다는 건, 한국의 공간에 산다는 것”

23일 넷플릭스는 성수 앤더슨씨에서 송년 미디어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유현준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 건축학부 교수가 ‘경계 없는 OTT 시대, 건축학적·도시학적 관점에서 OTT는 한국을 어떻게 바꿨나’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심화영기자


[대한경제=심화영 기자] “OTT는 더 이상 콘텐츠 유통 채널이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새로운 공간’이며, 그 공간 위에 올라선 사람과 국가와 도시가 문화 권력을 갖는다. 글로벌 OTT 시대, 한국은 물리적 영토가 아닌 시선의 지형도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23일 넷플릭스가 서울 성수동 ‘앤더슨씨’에서 개최한 송년 미디어 행사에서 유현준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 건축학부 교수는 ‘경계 없는 OTT 시대, 건축학적·도시학적 관점에서 OTT는 한국을 어떻게 바꿨나’를 주제로 강연하며 이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그의 결론은 “현대 사회에서 힘은 많은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공간에 서 있는 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공간은 벽과 땅이 아니라 ‘시간과 시선’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유 교수는 공간의 정의부터 다시 물었다. 그가 1994년 대학 졸업 당시에는 등장한 야후 웹페이지가 왜 ‘사이버 공간’이라 불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로마에서 천장 벽화를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간은 망막에 들어오는 2차원 이미지를 초당 수백 장씩 연산해 3차원 공간으로 인식한다. 결국 공간은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어디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로 정의된다”고 말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대인은 하루의 절반 가까이를 스마트폰과 OTT가 만든 가상 공간에서 산다. 과거 TV 앞 거실이 가족의 중심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스마트폰 속 플랫폼이 개인의 주된 생활 공간이 됐다.

과거 ‘국민 드라마’는 같은 시간, 같은 감정을 공유하게 만드는 사회적 장치였다. 그러나 지금 그 역할은 OTT가 대신한다. 다만 차이는 분명하다. 이제 공감은 국경을 넘는다. 유 교수는 “플랫폼이 매개체를 넘어 하나의 공간 역할을 하면서, 글로벌 시청자들이 동시에 같은 장면을 본다”며 “미디어 노출 자체가 권력이 되는 구조”라고 분석했다.

이는 고대 사회의 권력 구조와도 닮아 있다. 과거 신전의 꼭대기에 선 제사장은 정보의 독점으로 힘을 가졌고, 오늘날에는 알고리즘과 플랫폼 위에 선 인물이 시선을 독점한다.

유 교수는 문화 영향력의 이동을 기술사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로마와 장안성, 실크로드, 삼각돛의 등장으로 해상 무역이 바뀌며 세계 질서가 재편됐고, 도자기에 그려진 정원은 훗날 뉴욕시 맨해튼 중심부에 자리 잡은 센트럴파크 설계에도 영향을 줬다.

20세기 후반 문화 패권을 장악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제조업과 기술 우위, 할리우드 콘텐츠가 결합되면서 세계의 시선이 미국으로 쏠렸다. 이후 금융 중심 국가로 전환한 미국은 1990년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편입시켰고, 글로벌 분업 체계가 완성됐다. 그 전환점 이후, 아시아의 이미지도 바뀌기 시작했다. 1990년대 한국이 첨단 제조업 국가로 부상하며 드라마와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산됐고, 2020년대 들어 OTT는 이 흐름을 실시간 글로벌 전파로 증폭시켰다.

유 교수의 핵심 메시지는 여기서 나왔다. 유 교수는 “수억명의 사람들이 K-콘텐츠를 통해 한국의 골목, 집, 식당, 도시를 반복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이미 한국의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시선이 집중된 공간은 선망의 공간이 되고, 그 시선이 국가 전체로 확장될 때 물리적 국토를 넘어선 문화적 영향력이 형성된다. OTT는 한국을 ‘멀리 있는 나라’가 아니라, 익숙한 생활 공간으로 바꿔놓고 있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한국이 이 변화에 유리한 이유도 짚었다. 농토 중심의 평면적 공간에서 아파트라는 수직 공간으로 가치가 폭증했고, 1990년대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은 가상 공간 진입을 가속했다. 그 위에서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플랫폼 기업이 탄생했다. 그는 “네트워크가 깔렸고, 콘텐츠가 있었고, 이제는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그것을 실시간으로 수출하는 단계에 왔다”고 했다.

이번 강연은 OTT를 산업이나 트렌드가 아닌 도시와 권력의 관점에서 해석한 자리였다. OTT는 스크린 속 콘텐츠를 넘어, 사람들의 시간과 시선을 점유하며 국가의 공간 개념을 확장시키는 장치가 되고 있다.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 서 있는 자가 힘을 갖는다. 그리고 지금, 그 시선의 상당 부분은 K-콘텐츠를 통해 한국을 향하고 있다.

심화영 기자 doro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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