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BIM 의무화에 中企 공공시장 퇴출
국내도 AI 도입에 비슷한 양상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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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경제=최지희 기자] 인공지능(AI)이 건설 생태계 전반을 재편하는 가운데, 지역 및 중소 건설사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형사는 수십년 간 축적한 데이터를 AI와 결합해 경쟁력을 강화하는 반면, 데이터 인프라가 취약한 중소사들은 새로운 기술 장벽 앞에 서게 됐다. 특히 영국의 BIM(빌딩정보모델링) 의무화 사례가 국내 AI 도입 과정에서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영국은 2016년 모든 중앙정부 발주 공사에 BIM 2단계(Level 2)를 의무화했다. 당시 영국 중소건설연맹(NFB)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SME)의 60% 이상이 BIM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상당수가 “BIM 요구가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하드웨어, 직원 교육 비용이 ‘몇 년치 순이익을 한 번에 쓰는 수준’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소 건설사들이 겪은 대가는 가혹했다. BIM 2단계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중소사들은 공공 프로젝트 입찰에서 배제되거나 발주기관의 공급망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2022년 영국 중소건설업협회(FMB) 자료에 따르면, 중소사의 40%가 공공 프로젝트 입찰의 90%를 놓쳤고, 절반 이상이 지난 5년 간 입찰 성공률이 떨어졌다고 응답했다. 공공 프로젝트 수주는 BIM 역량을 갖춘 대형사와 일부 중견사에 집중됐고, 지역 중소사들은 소규모 민간공사나 하도급으로 밀려났다.
2020년 영국 코벤트리대학교 연구팀은 “중소사는 대기업보다 BIM 도입 가능성이 약 65% 낮으며, 공공 프로젝트에서 경쟁 열위에 놓여 있다”고 분석했다. 가장 최근인 2024년 조사에서까지도 영국 중소사들은 BIM 3단계,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등 고도화된 디지털 요구를 따라가기 버거워하며, 대형사와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건설업계 전문가들은 정부 주도의 AI 도입이 중소 및 지역 건설사의 시장 도태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BIM은 대형 프로젝트 중심이었지만, AI 기반 원가 검증과 예정가격 산정, 시설물 관리 평가체제는 모든 입찰에 적용되는 시스템”이라며 “추정가격 300억원 미만 시장까지 AI 요구사항이 들어오면, 중소 건설사가 겪는 피해는 훨씬 직접적이고 광범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AI가 중소사에 일방적인 악재만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구독형 AI 솔루션(AI SaaS, Software as a Service)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테스트핏(TestFit), 하이아크(Higharc)와 같은 AI 설계ㆍ견적 솔루션 기업들은 중소 건설사와 설계사에 AI 기술을 저렴하게 제공하며, 소수 인력으로도 대형사와 대등한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초기 투자 비용이 적은 AI SaaS는 중소사의 기술 격차를 좁히는 디지털 레버리지(Digital Leverage) 효과를 창출한다”고 평가했다.
AI 도입의 파급력은 업종별로 차등적으로 나타날 전망이다. 설계 및 엔지니어링 분야는 AI 기반 자동화로 단순 반복 업무를 대체해 ‘생산성 중심(Productivity-driven) 경쟁 패러다임’으로 전환해 중소사도 새로운 기회를 맞을 수 있다.
또 시공 분야에서는 AI가 덤핑 수주와 부적격 업체를 식별하는 ‘시장 정화 장치’로 기능해 기술력과 실적을 보유한 지역ㆍ중소 건설사의 수주 건전성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된다.
전문가들은 지금부터라도 견적ㆍ낙찰ㆍ단가 데이터를 엑셀이나 DB(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하고, 기본 프로세스를 문서화하며, AI 담당자를 최소 1명이라도 지정하는 ‘최소 디지털 체질’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 발주기관 고위 관계자는 “AI 시대에 과거 BIM 때처럼 ‘언젠가 한 번에 도입한다’는 전략은 통하지 않는다”며 “AI 시대에는 ‘할까 말까’가 아니라 ‘AI와 사람이 각각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고민이 길어지는 가운데 공공기관의 움직임이 기업을 앞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최지희 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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