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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4년의 치적과 2000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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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6-01-27 17:30:32   폰트크기 변경      
‘기념비’가 아닌 ‘유산’을 설계하라

한동욱 남서울대 교수

2026년은 지방 선거가 있는 해다. 2월 예비후보 등록을 기점으로 각 후보는 ‘천지개벽’ 식의 화려한 조감도를 내세우며 표심을 자극할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선거철은 우려가 앞서는 시간이다. 건축이 시민의 일상을 담는 내실 있는 그릇이 아니라, 단체장의 임기 내 성과를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 소비재’로 전락하는 현상을 반복해 봐왔기 때문이다.

종묘 역사문화유산지구와 세운4구역을 둘러싼 재개발 논란은 이러한 ‘도시ㆍ건축의 정치화’가 직면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는 사례다. 최근 한 방송사가 세운4구역 재개발 계획을 원점으로 돌리게 한 서울시의 무리한 ‘녹지생태도심’ 사업 추진의 문제를 지적하며 공론의 장에 다시 불을 붙였다. 서울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단층 위에서 시민의 일상이 영위되고, 그 역사가 정체성을 형성해온 유구한 유기체다. 이러한 논의는 일관되고 연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심장은 여전히 ‘단기적 성과’로 해결하려는 정치적 시계(視界) 속에 30년간 갇혀 있다.

이탈리아 건축가 알도 로시(Aldo Rossi)는 도시는 단순히 건물의 집합이 아니라 그 땅에 축적된 시간과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y)’의 실체라고 봤다. 종묘는 서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현재를 살고 있는 모두의 핵심적인 기억의 장소다. 그러나 현재 세운지구를 향한 고밀도 개발 논의는 이 소중한 기억의 층위를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단층적 가치로 덮으려 하고 있다. 서울시는 지상부 녹지 확보를 명분으로 기존 71.9m였던 높이 제한을 최고 141.9m까지 두 배 가까이 완화하려 한다. 현실화할 경우, 우리가 수백 년간 지켜온 역사적 경관은 영구히 상실된다.


김종헌 배재대 교수가 강조했듯 경관은 맑은 공기와 같은 ‘공공 인프라’다. 시민 모두가 향유해야 할 권리이며, 이를 지키는 것은 도시의 품격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다. 최근 유네스코와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가 세계유산영향평가(HIA) 완료 전까지 사업 승인 중지를 권고한 것은, 우리의 개발 논리가 국제적 보존 기준과 심각하게 충돌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많은 단체장은 임기 내 가시적인 ‘업적’을 남기려는 유혹에 빠져왔다. 도시・건축 개발사업은 표심을 자극하기 좋지만, 충분한 인문학적 고찰과 사회적 합의 없이 추진된 ‘전시성 성과’들은 완공과 동시에 지역 정체성을 왜곡하는 변종체로 전락하곤 한다. 진정한 도심 재생은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유리 낙원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존중하며 현대적 기능을 수용하는 ‘맥락적 접근’에서 시작해야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고층화만이 유일한 해답은 아니다. 역사 경관과 어우러지는 ‘중밀도 고품격 개발’은 지역의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형성하며, 장기적으로는 더 큰 자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물론 낙후된 지역 주민과 상인들의 재산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보존과 개발 사이의 접점을 찾는 ‘상생의 설계’가 정치영역에서 이뤄져야 한다.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규제가 아니라, 경관을 보존함으로써 발생하는 공익적 가치가 주민의 실익으로 돌아가게 하는 정교한 제도적 중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공중권 이양(Transfer of Development Rights)’ 제도의 도입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이는 보존이 ‘상생’으로 전환되는 지점이자 시장 친화적 도시 설계의 실현이다. 단체장은 화려한 조감도의 일방적 ‘설계자’가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에게 귀 기울이고 갈등을 조정하는 능숙한 ‘중재자’가 돼야 한다.

건축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며, 도시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투영된 유기체다. 4년의 임기는 짧지만 그 기간에 세워진 잘못된 건축물은 100년 넘게 도시의 경관과 시민의 삶을 구속한다. 이번 지방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은 임기 내 성과의 유혹에서 벗어나,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도시’의 밑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종묘의 처마 끝에 걸린 노을과 세운의 골목길에 깃든 삶의 애환은 우리가 투표용지에 찍는 도장보다 훨씬 더 긴 생명력을 지닌다. 건축을 정치적 소모품으로 다루지 말라. 도시는 정치인의 전시장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이 흐르는 공간이며, 그 가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지방자치 시대 리더가 가져야 할 진정한 정치적 혜안이다.


한동욱 남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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