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기고] 경주월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비편(碑片), 90년만에 긴 잠에서 깨어나다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기사입력 2026-02-20 10:52:03   폰트크기 변경      

2026년 병오년 새해 벽두에 경주월성(月城신라왕궁터)에서 발견된 고구려 비석 두 조각이 우리나라 고고 역사학계에 비상한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26년 2월 3일 국내 한 언론은 1937년 최남주에 의해 경주 서월성지구에서 발견된 비석 편과 2020년 12월 11일 국립 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장기명 학예사가 월성해자(月城垓字)출입로 배수로에서 발견한 비석 조각의 관계성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2024년 6월 이 방면의 전문 학자들이 모여 정밀하게 조사한 결과 서기 5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예서체와 빼닮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특히 이 비문 내용을 판독한 결과 광개토대왕비문 내용에 나오는 貢(공), 白(백), 渡(도), 不(불), 天(천) 등 동일한 예서체가 새겨져 있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1937년 최남주(崔南柱, 1905~1980)가 서월성 지구에서 발견한 비편과 2020년 월성해자에서 발견한 비편을 붙여서 3D스캔을 해본 결과 글씨체 아귀가 딱 들어맞는 원래 하나의 몸체였다. 그렇다면 왜 신라 왕궁터에서 광개토대왕비문과 닮은 고구려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을까. 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난 ‘신라 신민(臣民)설’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월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비석 조각은 5세기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국제정치 외교사적인 의문을 풀 수 있는 황금열쇠로 등장한 것이다.

◇ 1937년 월성비편 발견 경위

일제의 서슬 퍼런 칼날이 민족혼 난도질하던 1937년 6월 17일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 최남주는 서쪽 월성지구에서 최초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서체(書體)를 닮은 비석 조각을 발견하였다. 손바닥 크기의 비석 조각엔 웅혼한 고구려 예서체로 여섯 글자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최남주는 후일 월성비 조각 발견 경위를 구술로 회고하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937년 6월 17일 오전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월성 서쪽 지구(교촌 마을인접) 진입로 초입에서 사자 문양의 와당 조각과 신라 토제벼루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확인차 현장 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최남주는 토제벼루조각 등이 출토되는 것을 보았을 때 이곳을 신라 관청지구로 추정하였다. 인근 돌무지 속에 신라 토제벼루 조각과 연화문 와당 조각, 그리고 손바닥만 한 돌조각에서 고구려 예서체가 새겨진 금석문 조각을 발견하였다.


경주월성에서 발견된 고구려광개토대왕비의 한문예서체와 동일한 비석 조각. 오른쪽은 1937년 최남주에 의해서 월성지구에서 최초로 발견된 비석 조각, 왼쪽은 2020년 국립 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장기명 학예사에 의해 월성해자 출입로 동쪽 배수로 아래서 발견된 비석 조각. 두 조각을 맞춰보니 글씨체가 동일하였다. /사진: 국립 경주문화유산 연구소 제공

최남주는 서울 보성고보 재학시절 은사인 민족사학자 황의돈 박사로부터 금석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이러한 학문적 바탕으로 1934년, 1935년 남산신성비와 임신서기석, 1936 무열왕릉 비편, 1937년 흥덕왕릉 비편, 성덕왕릉 비편, 황복사 비편, 숭복사 비편 등 수많은 신라 금석문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서 월성지구에서 발견한 비석 조각은 기존에 자신이 발견한 신라 금석문과는 서체와 양식이 전혀 달랐고,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를 입증할 만한 호우총 유물과 고구려 중원비 등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쉽게도 고증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최남주는 경주 박물관에 가져와 후학이 언젠가 그 의미를 풀어줄 거라 기대하며 보존하고자 했고, 그렇게 고구려 비석 조각은 경주 박물관 수장고에서 긴 잠을 자게 되었던 것이다. 1969년 최남주는 신동아 3월호 ‘신라의 얼을 찾아 반세기’ 기고문을 통해서도 월성 비편 발견을 언급하였다.

◇ 금석문을 통해 바라본 신라와 고구려 외교관계

우리나라 고대 역사는 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시대의 역사를 복원하여 그 변천 과정을 설명한다. 그런데 고대 신라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역사는 문헌 기록이 빈약하므로, 유물과 유적은 물론 금석문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금석문이란 돌이나 금속 물질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이들 중 돌의 표면에 문자를 기록한 비석은 역사적 사실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다.

최남주는 평생을 바쳐 신라 천 년의 왕도 경주 벌판을 누비며 수많은 신라 금석문 비편을 발견하여 신라의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밝혀냈다. 그의 이러한 헌신적 발견과 노력이 없었다면 수많은 신라의 금석문들은 일제강점기의 잔혹한 지배 아래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1937년 6월 27일 최남주가 서월성지구에서 발견한 비석 뒷면에 발견 경위를 그의 친필로 기록하였다.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 보관. /사진: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과 연관 지어 한때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는지를 둘러싸고 다시 뜨거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2020년 월성해자에서 발견된 비편과 함께 1937년 최남주가 월성 서쪽 지구에서 발견한 고구려 비편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의 속에서 주어를 고구려로 해석한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문헌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드러난다.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신라, 백제, 가야를 공격하자 고구려가 이를 격파하고 세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대외 정복 활동을 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광개토대왕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서 위상을 보여주는 파천황과 같은 존재 아니던가.

오늘날 이 비문 속에 일본의 한반도 남부 식민설은 설득력을 잃었지만, 비문 문맥에 드러난 한때 신라의 고구려 종속 가능성은 여전히 주목해 볼 만하다. 5세기 신라왕릉이 즐비한 경주 노서동 일대 서봉총과 호우총 고분 등에서 고구려 연호와 광개토대왕의 명문이 새겨진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의 발견은 신라 왕경과 고구려가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 충주의 중원비에는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가 남진하여 신라군을 통솔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은 불교 문화유산의 신라전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경남 의령출토의 ‘연가7년명(延嘉七年銘) 금동여래입상’이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있다.


1961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탁본하는 최남주. 답사 현장에서 서울지역 대학교 사학과 학생들에게 신라 금석문의 중요성을 강의하였다. /사진: 필자 제공

최남주가 발견한 월성 고구려 비편은 그동안 학계에 관심을 끌지 못하였으나, 최근 월성에서 발견된 비편과 함께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국가 문화유산청 문화유산위원장 강봉원은 2022년 2월 11일 월성출토비편 포럼에 참석하여 “석당 최남주 선생님께서 오래전에 발견하신 비편이 박물관(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다가 이제야 빛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유족에게 전하였다.

민족 문화를 말살하고자 했던 일제의 탄압 속에서 석당 최남주가 월성에서 발견한 빗돌 조각은 한 세기 동안의 긴 어둠에서 깨어나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증거와 의미 깊은 가치로 재조명되고 있다. 여전히 학계에서 이 고구려 빗돌조각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지만, 그동안 신라 왕경 내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여러 정황증거로 볼 때 쉽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방정토에서 최남주는 월성 고구려 비편을 9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초혼시켜 준 후학 장기명, 전경효, 김동하, 노형석 등에게 환희로서 무척 고마움을 표하리라. 


현암 최정간 매월다암 원장 (차 문화연구가)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대한경제i' 앱을 다운받으시면
     - 종이신문을 스마트폰과 PC로보실 수 있습니다.
     - 명품 컨텐츠가 '내손안에' 대한경제i
법률라운지
사회
로딩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