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사에서 유럽의 인상주의 화풍을 대체로 모더니즘 아트의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1860년대에 발아한 모더니즘은 최소한의 기본 요소를 활용한 추상회화가 판치던 1910년대에 정점에 도달한다.
한국 역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쟁을 거치며 ‘모던’이란 장르가 화단을 줄곧 점령해 왔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모더니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다. 1957년 한묵, 박고석, 유영국, 황염수 등이 주축이 돼 결성된 모던아트협회는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적 현실 속에서 재해석하며, 제도권의 사실주의와 급진적 앵포르멜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실험하기도 했다. 다시말해 생활 경험을 기반으로 한 추상과 사유를 중시한 온건한 모더니즘이 본격적인 시동을 건 셈이다.
당시 작가들은 일상의 풍경과 자연, 역사와 신앙적 사유 등을 추상으로 치환하며 특정 양식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성을 유지했다. 이런 조형적 실험은 이후 단색화를 비롯해 기하학적 추상, 민중미술의 현실 참여적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부 독재와 산업화를 관통하는 격변의 시대 속에서 한국적 양식과 전통은 단순한 문화유산의 범주를 넘어 한국적 모더니즘의 윤활유로 작용하며 K-아트의 진화를 이끌었다.
| 박수근의 '모자와 두 여인' 사진=오케이엔피 제공 |
한국 화단의 치열한 모더니즘 논의가 현실과 어떻게 교차하고 생활 예술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대규모 이색 전시회가 마련됐다.
부산 해운대 그랜드 조선호텔 4층에 있는 오케이앤피(OKNP)가 지난 12일 시작해 다음 달 12일까지 여는 특별전 ‘모던, 모던과 전통 사이’이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온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모던’이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이 어떻게 이 땅의 전통적 감수성과 만나 독자적인 미학을 형성해왔는지를 살펴보는 자리다.
오케이앤피는 ‘한국미술시장의 대장주’ 김환기를 비롯해 나혜석, 박수근, 이중섭, 남관, 이인성, 이응노, 도상봉, 장욱진, 천경자, 류경채, 이대원, 장리석, 천경자 등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15여명의 작품 30여점을 펼쳐 보인다. 대가들이 서로 다른 세대와 미학적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전통을 단절의 대상이 아닌 새로운 표현의 자원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 작품들이다.
오상현 오케이엔피 대표는 “실제로 한국 근현대미술은 단순히 서구 모더니즘을 받아들이는 과정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면서도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쟁, 산업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대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는 거장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관람객과 미술애호가들을 반긴다. 역시 단연 백미로 꼽히는 작품은 박수근의 작품 ’노상‘이다. 동네 쉼터에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남정네들을 향토색 짙은 색감과 또렷한 윤곽선, 특유의 우둘투둘한 질감을 드러내는 특이한 기법으로 그린 명작이다.
옆쪽으로 한 발짝 옮기면 박수근의 1964년 작 ’모자와 두 여인‘이 화강암 같은 미적 아우라를 뿜어낸다. 가난한 시대에 일을 마치고 일상 속으로 돌아가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의 풍경이 묘한 울림을 준다.
천재 화가 이중섭의 그림도 눈길을 붙잡는다. 한국인에게 각별한 대상인 소의 특성을 선하면서도 우직하게 묘사한 이중섭은 6·25전쟁을 피해 1951년 가족과 함께 제주 서귀포에서 1년 가까이 산 시점을 경계로 민족적인 주제의식에서 점차 자전적인 내용으로 옮겨갔다. 서귀포 시절에는 소를 중심으로 한 향토적·서정적 주제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게, 물고기, 가족을 다룬 자전적 요소가 한층 두드러진다. 그의 ’무제‘는 소를 비롯해 말, 닭, 아이 등 다양한 소재로 시대적 정서를 거친 질감과 강렬한 선으로 응축해 한국적 애환을 깊이 있게 담아냈다.
한평생 술을 벗삼아 예술에 빠져 기인으로 살다간 장욱진의 화풍은 동심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1985년에 제작한 ’나무와 소‘ 역시 서양화가의 작품답지 않게 토속적이고 동화적이다. 듬직하게 서 있는 소와 귀여운 개, 힘차게 날아가는 까치, 하늘에 둥둥 떠 있는 해, 발랑 드러누워 있는 사람 등을 화면에 파격적인 구도로 배치해 순진무구한 동심을 묘사했다. 사람과 동물, 자연이 적절히 구성된 화면에는 충만함과 허함, 유한과 무한이 공존하는 것 같다
| 유영국의 'work' 사진=오케이엔피 제공 |
’산의 화가‘로 잘 알려진 유영국의 1975년 작품 ’work’도 색채 미학을 한껏 발호한다. 산들의 다양한 이미지를 마음속에 담아뒀다가 작업실에서 하나하나 꺼내 그린 색면추상 작품으로 꿈틀거리는 생명력과 풋풋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자연 풍경을 기하학적 구조와 색면으로 환원하며 동양적 자연관을 현대적 추상 언어로 확장한 게 싱그럽게 다가온다.
한평생 ‘꽃비’처럼 살다 간 이대원이 화려한 색채로 들녘의 풍경을 수놓은 작품도 살포시 얼굴을 내민다. 그는 1950~60년대 한국 화단에 일던 미니멀리즘 경향의 추상화 바람을 뒤로 하고 자연 풍경을 그리는 구상회화를 고집하며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지켰다. 전시장에 걸린 이 작품은 민화적 도상과 자연 풍경을 단순화된 화면과 현대적 색채 감각으로 재구성한 게 유별나다.
| 이인성의 '풍경' 사진=오케이엔피 제공 |
전시장 중앙에는 한국 사질주의 대가 이인성의 ‘풍경’이 고개를 바짝 들고 있다. 기와집 앞에 당산나무가 우뚝 서 있는 한적한 풍경을 수채화처럼 잡아낸 수작이다. 나무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남녀의 표정에서 시공을 초월한 동화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강력한 필선과 대담한 구도 안에 인간적 우수와 해학을 담은 이응로의 추상화, 전쟁과 고난을 문자 추상으로 응축한 남관의 작품, 전통 채색화의 어법을 바탕으로 인물과 자연을 강렬한 색감으로 풀어낸 천경자의 그림도 눈길을 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오상현 대표는 “미술애호가와 관람객들에게 한국 근현대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며 만들어낸 한국적 미의식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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