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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창] 골목길에서 만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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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29 08:00:11   폰트크기 변경      

정태헌(수필가)

 

가을 햇살 짱짱히 고인 골목길, 두 사람이 앞서 나란히 걷고 있다. 오십여 미터쯤 되는 호젓하고 맑은 골목길이다. 난 오른쪽에서 들어서는데 그들은 왼쪽에서 먼저 골목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흰 지팡이를 두드리는 사내 왼팔에 주황 지팡이를 접어 손에 든 사내가 매달려 가고 있다. 흰색 지팡이일 텐데 매달려 가는 사내의 지팡이가 주황색이라니 왠지 궁금하다. 뒷모습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주황 지팡이는 흰 지팡이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십 초반쯤 돼 보인다. 흰 지팡이는 쥐색 바지에 보라색 점퍼를 입고 있고, 주황 지팡이는 구겨진 감색 양복에 파란 운동화를 신고 있다. 그들의 발걸음은 각기 다르다. 흰 지팡이는 지팡이로 땅을 더듬으면서도 걸음걸이가 재바르지만, 주황 지팡이는 흰 지팡이의 팔에 매달려 끌리듯 사뭇 종종걸음을 친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난 몇 발치 떨어져 발소리를 죽여 가며 두 사람 뒤를 따른다.


“오늘은 잘해야 해. 저번 때처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 흰 지팡이가 다그치자 주황 지팡이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


“목소릴 들으니까 얼굴이 참 곱다고 생각되던데, 형이 말을 자꾸 더듬는 바람에 산통이 다 깨졌지 뭐야. 우린 귀가 눈이란 말이야.” 흰 지팡이는 앵하다는 듯 지난번 일을 되새기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맞선이라도 본 걸까. 주황 지팡이가 말을 얼른 바꿔 꺼내 든다.


“양복이 영 어색하구만. 꼭 이렇게 빌려 입어야 허나? 목이 이리 조여서야 말이라도 제대로 하겠어!” “형, 그런 말 하지 마라니까. 서로 안 보인다고 저번 때처럼 대충 입고 가면 또 퇴짜야. 느낌으로 다 안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손은 무릎 위에 둬. 접때처럼 더듬거리다가 물잔 넘어뜨리지 말고.”
흰 지팡이는 가끔 공중에 지팡이를 흔들며 슬거운 말투로 주황 지팡이를 나무란다.


“하긴 목청이 참 곱더라. 마음도 곱고 얼굴도 예뻤겠지.” 주황 지팡이의 말투엔 아쉬움이 묻어난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은행나무 가지에 걸려 햇살과 뒤섞여 반짝인다. 두 사람의 등에도 햇살이 낭창하게 흐른다. 하지만 주황 지팡이의 등은 약간 굳어 보인다. 흰 지팡이의 잔소리가 없더라도 오늘은 실수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긴장한 탓일까.길을 걷고 있는 저들에게 오늘은 햇살 같은 축복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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