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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 당신 너머, 모르는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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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06 07:00:14   폰트크기 변경      
   

 

 

 

 

 

 

 

 

“자, 이거 받아요.” 문단의 대 선배이신 분이 작은 박스 하나를 넘겨줬다. “아니, 무엇인지요?” 박스를 받아 개봉하니 먼지가 풀풀 나는 낡은 고서 네 권이 들어 있다. ‘웬 케케묵은 책을’ 시큰둥하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동네 아래쪽에서 불길이 솟아올라 순식간에 나를 집어 삼켰고 뜨거운 연기 속에서 나는 죽어갔다.

 

 놀라 깨어보니 새벽 1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남편이 일어나 불을 켰다. 날마다 꿈을 꾸지만 대개는 기억을 잘 못하는데 이 날 꿈은 매우 선명하여 얘길 했더니 “길몽이네.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하며 등을 두드려 줬다. 5시집이 도착한 날의 일이다.

 

 날이 새자 남편은 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무슨?” 놀라 쳐다보니 씩, 웃으며 금일봉을 시집 위에 얹어준다. 간밤 꿈이 길몽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수고했어, 집안 형제들에게 책 좀 나눠 줘.” 그러고 보니 난 그동안 양가에 내 책을 나누지 않았다. 괜히 시인입네, 글 쓰네, 집안에 소문을 내는 것도 그렇고 혹여 부담이라도 줄까 싶은 생각도 컸기 때문이다.

 

 다음 날 SNS 이웃 한 분께서 시집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 했다. 온오프라인 서점 얘길 하다가 사인본을 드리고 싶어 주소를 달라했더니 계좌번호를 안주면 주소를 줄 수 없다고 막무가내셨다. 평소 그분이 올리는 단상을 통해 진솔한 삶과 철학을 좋아했던 터라 계좌번호를 보내드렸더니 놀랍게도 시집 여러 권을 살 수 있는 돈을 입금시켰고 끝내 주소는 주시지 않았다.

 

 처음엔 몹시 당황하고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분의 뜻이 무얼까 곰곰 생각했다. 그러다 많은 분들이 시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지역의 작은 도서관, 주민센터, 평생학습관, 종교기관들에 시집을 사서 기증하는 일이다. 어떤 사랑은 수천의 얼굴로 처처를 살린다. 모르는 이름으로 내 어둠의 바닥에 와 닿은 수많은 당신들에게 마디마디 찬란한 가을을 부친다.

 

권애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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