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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 봄철 피크닉 엄마 손맛의 추억… 알싸한 복합味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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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4-17 06:00:15   폰트크기 변경      
“출근길 아침이라도 괜찮아”

아삭하고 짭조름한 우엉단무지

부드러운 소시지ㆍ어묵조림 만나

새로운 맛 연출… 꾸준히 인기


시금치→아보카도, 단무지→비트

통조림 참치→생참치 등 재료 다양

김밥의 무한변신… 건강까지 챙겨


마포 꽃나물김밥ㆍ경주 우영김밥

통영 충무김밥 등 인기메뉴 눈길

상추위에 올려 ‘쌈’으로도 즐겨


김밥의 진화는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이 김밥 재료가 될 수 있다. 사진은 서울 상수동 연우김밥.



봄의 기억은 다양하게 남는다. 어린 시절 내게 봄은 소풍이었다. 봄 소풍, 가을 운동회였다. 서울 변두리에 살았던 내게 소풍(消風)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왕릉, 배낭, 사이다, 고시레(김밥 하나를 주변에 던지는 것), 보물찾기 정도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압도하는 가장 진하고 강렬했던 기억은 단연 김밥이다. 소풍날짜를 받아들면 늘 설렜다. 비가 올까 전전반측 잠 못 이루고 장닭처럼 일찌감치 깼다.

요란스레 쇠종을 때려대는 자명종보다 더욱 기세등등하게 나를 깨운 것은 부엌에서 흘러든 고소한 참기름 향기다. 장닭보다 더 일찍 깨어난 어머니는 부지런히 김밥을 말고 있다.

난 그 바쁜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냉큼 커다란 김밥 하나를 통째로 집어 입에 물고 달음질친다. 입안엔 갓 말아낸 김밥의 따스한 온기가 가득 차고 온갖 고소한 향이 콧속을 찌른다. 소풍의 기억이란 결국 김밥의 것이었다.


경주 성동시장 보배김밥의 우엉김밥


김밥은 한국인의 맛이다. 복합미(複合味, Blending Taste)를 선호하는 한국인은 반찬을 한데 죄다 넣고 슥슥 비벼 한 번에 먹는다. 그 안에서 각각의 맛을 찾는다. 김밥도 그렇고 비빔밥이며 상추쌈, 섞어찌개 등이 그렇다. 심지어 한정식도 그렇다. 반찬을 십수 가지 차려놓고 밥 한술과 함께 여러 반찬을 먹는다. 결국 입안에서 섞어 복합미를 느낀다. 모두 한 상을 받았지만, 각각 다른 맛을 느꼈다. 찬을 먹는 순서와 조합에 따라 모두 다른 음식을 먹었다. 경우의 수에 따라 입속 맛의 조화가 수도 없다.


김밥을 입에 넣고 씹노라면 각각의 재료들이 뒤섞이며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부드러운 소시지와 풍미 좋은 어묵조림, 아삭하고 짭조름한 우엉과 단무지, 참기름이 더해진 밥이 구강 안에서 섞인다.

향긋한 김은 이들을 아울러 모두 태우고 가는 버스다. 모두들 같은 버스를 탔지만 씹는 방식에 따라서 또 달라진다. 혀 놀림에 따라 새로운 조합을 느껴볼 수 있다. 복합미의 장점이 그대로 김밥 안에 들었다.

‘아는 맛’이라 더욱 끌린다. 김밥은 비빔밥과 같은 맥락이라 유독 한국인에게 인기가 높다.

시금치에서 아보카도로, 단무지는 비트로, 통조림 참치는 생참치로. 과거보다 더욱 다양해진 재료는 김밥의 지속가능성을 지지하고 있다.


궁합도 충분히 좋다. 맛이나 영양에서 상호보완하는 재료다. 섬유소와 탄수화물, 단백질이 그렇고 단맛과 매운맛, 짠맛, 싱거운 맛이 서로 돕는다. 이중 눈에 가장 먼저 와닿는 김은 구성물 어디에도 없는 무기질과 향기를 담당한다. 보이지 않는 참기름은 풍미를 책임진다. 이로써 김밥은 완벽해진다.


충무김밥


사실 김밥은 귀한 몸이었다. 지금이야 바쁜 일상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구황 식품’ 신세 취급을 받지만, 예전엔 값비싼 별미였다.

예나 지금이나 김밥은 손이 많이 간다. 그 탓에 평소에는 해먹기 힘든(특히나 소식구라면), 그래서 소풍쯤은 가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일종의 행사음식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했고 몸값도 귀했다. 매일경제신문 1981년 4월10일자에는 ‘롯데쇼핑센터 지하 1층에서 인근 회사원들의 점심 식사로 각광받는 김밥이 900∼1500원에 팔리고 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무려 40여 년 전인데 요즘 가격과 큰 차이가 없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1992년 10월25일에 동아일보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1000원 받던 김밥 가격을 1200원으로 올렸다’며 바가지 상술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요즘도 2500∼4000원이면 사먹을 수 있으니 물가상승률을 거스른 음식이 김밥이라고 할 수 있다. 40년간 이 정도 오른 상품은 바나나와 김밥밖에 없어 보인다.


제주도 전복 김밥


이런 김밥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여러 의견이 있지만 대나무 발로 둘둘 말아낸 지금의 김밥 형태는 일본 노리마키(海苔券)에서 시작된 것이 맞다. 밥을 김에 말아서 먹는다는 원리는 노리마키, 그중에서도 후토마키(太券)의 모양새다. 이를 위해 김을 종이처럼 네모나게 떠내는 ‘김발’도 일본식이 접목됐다.

하지만, 우리 김밥의 특징인 복합미를 포인트로 놓자면 김밥과 노리마키가 다르다.

일본은 음식에서 복합미보다는 단순미(單純味)를 선호한다. 대표적 김밥인 호소마키(細券, 가늘게 만다는 뜻)는 박고지나 오이, 참치 붉은살(아카미ㆍ赤身) 등 재료 하나만 넣고 가늘게 말아낸다. 재료 한 가지 본연의 맛을 즐기기 위해서다.


혼마구로 노리마키


참치김밥, 땡초김밥 등 무엇이 들던 김밥이란 말이 어김없이 붙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에선 김과 밥이 이름에서 사라진다. ‘그저 거들 뿐’이라 생각한다.

‘말이’라는 의미의 마키(券)로 대신한다. 간표마키, 데카마키, 갓파마키, 신코마키 등이 각각 박고기말이, 참치말이, 오이말이, 다쿠앙말이 등으로 해석된다.

모노드라마처럼 단 하나뿐인 주인공이 도드라지니 당연히 무대(김과 밥)의 입지는 약해진다.

이에 비해 우리 김밥은 총출연하는 블록버스터다. 참기름장과 갖은 채소, 다진 고기 등을 다채롭게 채워 넣는 방식은 화려하고도 박진감이 넘친다. 이를 한 번에 먹는다. 모든 출연진을 단 1막 첫 장에 쏟아내는 셈이다.



간사이식 후토마키


물론 일본에도 여러 재료를 넣고 크게 말아놓은 간사이(關西)식 후토마키(太券)가 있다. 하지만 이는 한번에 먹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풀어헤쳐서 하나씩 맛을 봐야 한다. 우리가 먹는 모습과는 다르다. 게다가 후토마키는 20세기 초 처음 문헌에 등장했을 정도로 기원이 불분명해 우리 김밥과 서로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겐 자생적인 ‘김쌈’ 문화가 있었다. 문헌상 김을 양식하고 즐겨 먹은 역사는 우리가 더 빠르다. 김은 삼국유사에도 등장하고 본초강목에는 ‘신라의 김’이 언급된다. 경상도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도 광양과 하동에서 김을 길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인조 18년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이던 전남 광양 김여익이 최초로 김 양식법을 보급해 그의 성(姓)을 따서 ‘김’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 문헌에 노리마키가 등장한 시기와 비슷한 1800년대 말엽에 나온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김에 솔로 기름을 발라 구웠다가 밥을 싸먹는 데 쓴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1928년 잡지 별건곤에는 ‘김에 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재웠다가 석쇠에 구워 밥 위에 놓아먹는다’고 자세히 나온다. 우리 가정에서 김을 먹는 방법인데 일본의 김 식문화와는 많이 다르다.

다만, 김밥은 기존에 이미 상식(常食)하던 음식 ‘김쌈’이 일본의 식문화 영향을 받아 말아먹는 형태로 변형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티끌만한 작은 해초에 불과한 김을 제지(製紙)하듯 종이처럼 떠서 말린 후 쌈에서 말이의 형태로 김의 식용법이 변화한 것이다. 둘둘 말린 원통 형태를 차용한 김밥은 당당히 대중요리로 우리 식탁에 자리매김했다.


김밥을 쌈으로 즐기기도 한다.


김밥은 맛도 좋지만, 영양학적으로도 꽤 균형 잡힌 음식이다. 고기와 채소, 짠지를 충분히 넣었고 해조류로 감싼다.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어 좋고, 간편하게 섭취하지만 밥의 양에 비해 찬이 많아 섬유소는 높고 열량은 그리 높지 않다. 탄수화물과 단백질, 채소를 한꺼번에 넣어 한입에 즐기는 햄버거처럼 간단하게 먹을 수 있지만, 비만을 초래하는 외국계 패스트푸드에 비할 바 아니다.

예전에 소풍처럼 즐거운 날에 함께해온 김밥은 이제 허둥지둥하는 출근길 아침이나 바쁜 작업과 이동 중 끼니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값도 싸서 주머니 사정 가벼운 학생과 회사원에게 아침 한 끼를 책임지는 ‘면학과 근로의 연료봉’으로 자리 잡았다.

어느덧 무르익은 봄, 언젠가 그날의 김밥이 떠오른다. 김밥 한 줄이 가방에 들어 있다면 그 어딜 가든 옛날의 소풍길처럼 즐겁고도 흐뭇할 테다.


■ 김밥맛집

◇연우김밥=서울 마포구 상수동 연우김밥은 다양한 별미 김밥으로 소문난 집. 당근과 우엉조림, 단무지, 시금치, 햄, 계란말이 등이 들어간 연우김밥은 물론, 담백하고 싱그러운 맛을 내는 꽃나물김밥도 인기메뉴다.

◇보배김밥=경주역 근처 성동시장에서 우엉김밥으로 이름을 날리는 집. 달콤 짭조름하게 조려낸 우엉을 김밥 가운데 듬뿍 넣고 위에 따로 수북이 더 얹어준다. 손에 들면 제법 묵직하다. 고소한 참기름이 김밥의 맛을 완성한다.

◇통영 엄마손김밥=김에는 순전히 밥만 말고 호래기(참꼴뚜기)나 홍합을 조려 섞박지와 함께 먹는 충무김밥이다. 옛날식으로 홍합과 호래기 등을 조려 꼬치에 꿰어준다. 장어대가리로 끓인 시락국과 함께 훌훌 마시듯 먹으면 좋다.


글ㆍ사진=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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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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