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1967년 대선 유세장서 공약화
당선 후 곧바로 주무장관에 지시
대통령령으로 ‘건설추진위’ 공포
총공사비 300억ㆍ4차선 계획 발표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1일 착공해 1970년 7월7일 준공했다. 올해로 준공된 지 53년이 됐다. 경부고속도로가 사회경제적으로 갖는 의미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건설된 어떤 사회기반시설도 범접을 허락하지 않는다. 국토의 대동맥이라 불리며 경제 고도성장의 상징물로 국민 개개인 마음에 각인돼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후 53년 동안 줄곧 교통과 경제, 사회문화, 기술적인 측면에서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될 당시 우리나라 경제지표는 인구 3013만명, 실업률 6.2%, 물가상승률 12%, 1인당 국민총생산(GNP) 142달러, 수출액 3억2000만달러 등 후진국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속도로 건설을 꿈꾸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야당과 여론의 심한 반대는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1967년 4월29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경부고속도로건설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
제6대 대통령선거를 사흘 앞둔 1967년 4월29일 서울 장충단공원에 마련된 대통령선거 유세장 연단에 재선에 나선 박정희 후보가 올라섰다. 그는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 앞에서 목청을 높였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몇년 후에 우리 경제가, 우리나라의 산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리라는 그런 전망을 가지고 보다 더 규모가 크게, 여기에 알맞게끔 국토건설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4대강 유역에 대한 개발이라든지, 또는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경부고속도로 계획 또는 대전에서 목포에 이르는 호남고속도로 이러한 것을 앞으로, 대략 금년 내로 이 계획이 완성되리라고 봅니다만은, 막대한 예산이 듭니다. 서울과 부산 간의 고속도로를 만들면 여기에는 몇억불이라는 돈이 들어갑니다. 과거에는 이런 것을 우리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소리를 하면 정신 돌은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5월3일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51.4%를 득표해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 대통령은 당선 후 주원 건설부장관에게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67∼1971년)이 끝나기 전에 경부 간 고속도로를 완성하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11월 건설안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계획단 발족을 서두르라고 엄명했다. 그리고 12월1일 주원 건설부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이 발족했다.
주원 건설부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이 1967년 12월1일 발족했다. 사진은 현판식 모습. <사진 한국도로공사 > |
계획단은 발족식서 경부고속도로의 제1공구인 서울∼수원 간 노선을 1968년 2월15일 이전에 착공하고 노선은 현행도로와 따로 남서울 제3한강교를 기점으로 용인군을 거쳐 수원까지 직선 32㎞ 구간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는 서울, 수원, 대전, 대구, 부산을 통과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농경지와 민가가 많은 지역을 피해 농한기를 이용, 빨리 착공하라고 지시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2월13일 국무회의에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추진위원회 규정이 대통령령으로 의결ㆍ공포됐다. 이때까지 정해진 사업계획은 총공사비 300억원을 들여 주행시간 5시간의 4차선 고속도로를 건설하며 건설구역 순위는 서울∼수원, 수원∼대전, 대구∼부산, 김천∼대구, 대전∼김천 등이었다.
문제는 재원의 확보였다. 유력한 차관공여선인 국제개발협회(IDA)는 앞서 세계은행 전문가들이 행한 예비조사를 근거로 경부고속도로건설에 회의적이었다. 경부축은 현대식은 아닐지라도 도로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만큼 서울∼강릉, 포항∼광주 등 동서 횡단선을 먼저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그들의 견해였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예정부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사진 국가기록원> |
재무부는 1968년 1월15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재원 조달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방안에는 현재 100%인 휘발유세를 200%로 올리기 위해 2월 중 석유류세법개정안을 국회에 올리고 도로공채를 적기에 발행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고속도로 건설업체의 시설과 장비에 대해서는 투자공제제도를 적용하고 중장비 도입에 관세를 면세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국제기구로부터의 외자차관 및 중장비 도입에 필요한 외자를 얻어오기 위해 국제금융기구와 교섭한다는 내용이었다. 앞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자금 조달을 위해 50억원가량의 도로공채를 발행해 운수업자 등 도로연관산업분야 기업인에게 강제 소화시키기로 방침을 정했었다.
석유류세법개정안은 2월 국회에서 신민당 소속 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공화당 단독으로 의결했다. 정부는 세법개정으로 139억원을 충당할 계획을 세웠다. 세법개정을 통한 휘발류세의 인상은 차관을 확보하지 못한 정부가 건설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개도국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차관발급을 거부해 재원조달이 난관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당시 1인당 GNP 142달러 불과
재원조달 가장 큰 걸림돌 작용
사업 현실화될 수록 반대 커져
경제계도 ‘역부족’ 부정적 시선
경부고속도로건설이 현실화되면 될수록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실제 건설부를 제외한 정부부처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권, 심지어는 건설업계를 제외한 경제계에서도 부정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는 재정이나 장비, 기술 등 모든 측면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하기에는 역부족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도로공사가 발간한 고속도로 10년사는 ‘일부 과격한 인사 중에는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예로 들어 국가재정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무모한 계획이라고 극언까지 했었다’고 기록했다.
착공에 앞선 1968년 1월8일 야당인 신민당은 성명을 통해 “정부가 예산조처도 없는 경부간고속도로를 착공하는 것은 예산법정주의에 어긋나는 처사”라며 “이 고속도로 개통으로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1일 생활권은 이미 도로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새로운 의미가 없다”고 비난했다. 또 “정부는 고속도로의 신설보다 철도의 고속화와 호남선복선을 먼저 실현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정부는 1968년 2월 서울∼수원 간 구간의 착공계획을 세웠지만 재정확보나 노선 확정 등 모든게 불투명했다. 반대나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정부의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에 힘을 실어주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조선일보 1967년 12월27일자에 실린 ‘경부고속도로계획과 외국기관’이라는 논평을 소개한다.
‘경부간고속도로의 건설계획은 현정부의 권위를 건 대사업이요, 외국인들이 무어라고 하건, 당초 예정대로 내년 2월부터 경수간 도로건설에 착공하겠다는 방침에 변동이 있어서는 안된다. (중략) 차관교섭이 원만치 않을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건설부가 내자를 주로 하는 건설을 위해 소요비용을 340억4000만원으로 잡고 유류세, 도로공채, 통행세, 군지원, 기존예산을 계상하고 국내생산이 안되는 중장비 등을 상업차관으로 수입할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도 우리는 불가피한 형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이제 정부수립 20년의 해를 맞이하여 언제까지나 경제건설의 주도권이 남의 나라의 용훼(容喙)에 좌지우지될 수는 없을 것이며, 옳다고 믿는 이상 외국기관의 충고는 충고대로 섭취하되 건설계획의 주체성에 조금이라도 동요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하략)’<참고 한국건설통사 한국도로공사 30년사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